누암서원은 사라졌지만, 근처에 있었던 누암(樓巖)을 소재로 글을 남긴 이들이 몇 있다. 그중에 몇 편의 시를 통해 그들이 보았던 풍광과 느낌을 상상해 본다.
누암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이는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다. 그의 문집 『백담집(栢潭集)』에는 누암을 직접 언급한 시가 여섯 편이 확인된다.
<누암의 여창에서 새벽에 일어나 우연히 쓰다[樓巖旅窓 曉起偶書]>
昨來孤棹泝斜陽 어제 온 외로운 배 석양을 거슬러 올라가니 水色煙光共杳茫 물빛과 안개 빛 모두 아득히 펼쳐졌었네 回首忽驚新道路 고개 돌리니 길이 새로워 홀연히 놀라니 何心更管舊行裝 무슨 마음으로 다시 옛날 행장 꾸리는가 半簾風月詩千首 반쯤 걷힌 주렴에 비친 풍월에 천 수 시 짓고 萬里湖山夢一場 만 리 강호에서 한바탕 꿈꾸는구나 騎馬明朝過嶺去 날 밝으면 말 타고 고개를 넘으리니 碧雲東望是家鄕 동으로 푸른 구름 이는 곳이 고향이라네 - 구봉령, 『백담집』 속집 권3, 칠언율시
누암에는 길가는 이들을 위한 숙소가 있었던 듯하다. 새벽에 일어나 우연히 썼다는 이 시에는 서울에서 배를 타고 올라와 누암에 도착한 엊저녁부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석양 노을에 반짝이는 강물과 저녁 물안개가 포근하게 누암을 감싸며 아늑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잠깬 새벽에 여독은 풀리고 반쯤 걷힌 주렴에 비친 달빛에 묻어오는 새벽 공기을 느끼며 시 짓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곧 해가 뜨면 말을 타고 고개를 넘는다고 했다. 그 고개는 동쪽에 있으며 그 너머에는 고향이 있다고 했다.
구봉령은 안동부 동면 모산동(茅山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안동이다. 그의 연보를 보면, 1568년(선조 1)에 고향에 돌아가 퇴계 선생을 뵙고 예를 물었다는 기사와 1570년(선조 3) 8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퇴계 선생을 뵈었다는 기사가 있다. 두 시기 중의 한 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암에 들러서 이 시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를 타고 누암까지 와서 다시 말을 갈아타고 동쪽 고개를 넘을 예정인데, 그 고개는 죽령이 된다. 서울과 고향 안동을 오가며 몇 번 들렀을 누암은 구봉령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권호문(權好文, 1532~1587)도 1560년(명종 15)에 충주에 들렀을 때 누암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달밤에 누암에 올라[月夕上樓巖]>
平石如鋪簟 평평한 바위 대자리를 편 듯하여 臨流勝倚船 물가에 서니 뱃전에 기댄 것보다 낫네 沙洲圍宿雁 모래톱은 잠든 기러기가 에워싸고 村渡絶炊煙 마을 나루에는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네 月朗仙情惹 달빛 밝아 선경에 온 마음이 일어나고 風高客袖牽 바람 높아 나그네 소매를 이끄네 坐觀魚躍處 앉아서 물고기 뛰는 곳을 보니 細細浪紋圖 물결무늬가 가늘게 번져가네 - 권호문, 『송암집』 권2, 시
권호문은 달밤에 누암에 올라갔다. 누암은 남한강가의 작은 동산이었다. 강쪽으로 바위 벼랑이 있어서 그것을 ‘다락바위’라고 했고, 누암(樓巖)으로 적었다. 위쪽은 자리를 편 듯이 평평한 곳이었다. 작은 동산이지만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달빛이 비친 강에는 물고기가 뛰는 것이 보였고, 그 파장이 퍼져나가는 게 어른어른 비칠 정도로 맑았다.
누암은 1970년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폭파되었고, 그 허리에 신작로가 나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가 누암이라고 누군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이다. 누암의 바위를 폭파할 때, 청명주 장인이었던 김영기 옹이 광산을 경영하고 있던 때여서 다이너마이트를 제공해 주어서 그것으로 폭파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때 강을 따라 있던 길이 올려졌다.
잘 보이지 않지만 누암 강길에서 올려보면 누암리 산제당이 있다. 25년 전에 충주의 동제를 조사하며 보았던 산제당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것을 대신하여 조립식 건물로 지은 산제당이 그 자리에 있다.
마을의 산제당이지만 다른 기능이 있었던 곳이다. 남한강 수운이 활발하던 때에 배나 떼를 몰면서 물길을 내려갈 때 왼편 앞으로 마주 보이는 위치이다. 직전의 창동 마애불이 쇠꼬지여울을 지난 직후에 만나는 것이라면 누암리 산제당 역시 남한강 물길과 연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물길 옆에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던 곳이 물길을 따라 분포해 있었다.
권호문과 구봉령이 누암에서 머물던 때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이 끝난 후에 조선 사회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을 표방하며 서원(書院)이 난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1689년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사사(賜死)된 후 1695년에 송시열과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을 모신 누암서원을 세웠다. 누암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 그곳을 찾은 이들은 봉안제문(奉安祭文)을 지어 기렸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충주 누암에 있는 우재(尤齋)의 사우에 위패를 봉안한 제문(忠州樓巖尤齋祠宇奉安祭文)>을 시작으로 누암서원을 찾은 이들이 남긴 글이 뒤를 이었다. 이기홍(李箕洪, 1641~1708),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이여(李畬, 1645~1718), 정호(鄭澔, 1648~1736), 임징하(任徵夏, 1687~1730), 남유용(南有容, 1698~1773),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등이 그들이다.
영조 31년(1755년) 2월에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누암에 이르러 배로 갈아타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배 위에서[舟中]>
捨却鳴騶放小舟 명추를 버려둔 채 작은 배를 타고 琴臺雲木杳回頭 탄금대의 구름 낀 나무를 아득히 돌아보네 靑天轉共鷗波闊 창천은 갈매기 물결과 함께 점차 트이는데 向日虛爲鳥道愁 지난날엔 부질없이 조도를 시름겨워했지 景昃人煙多在潊 석양에 밥 짓는 연기는 강변에 가득하고 春寒渚柳未藏樓 봄추위에 물가 버들은 누대 미처 못 감추었네 恭陪栗里歸田興 공손히 율리 모시고 전원 돌아가는 흥취 속에 且學張融盡室浮 장융이 온 식구와 물 위에 살던 일을 배우리라 - 채제공, 『번암집』 권8, 시-載筆錄
채제공의 부친 채응일(蔡膺一, 1686~1756)이 비안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를 모시고 들렀던 누암 주변의 풍광을 그리며 느낌을 적었다.
누암에 이르러 비안현감을 전송하며 따라왔던 마부들과 이별하고 배를 탔다고 하지만, 누암서원에 잠시 들렀을 것이다. 배에 올라 둘러본 풍광은 멀리 탄금대가 보였고, 강가 마을에서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가득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광이다. 댐이 막히고 자동차전용도로가 뚫리면서 다시금 한적한 누암 옛길에서도 막연한 상상을 하게 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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