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는 30리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수안보나 송계 방면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향산 정류장에서 내려 달천을 따라 걸어 내려오거나, 아니면 주덕, 신니, 노은 방면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원달천 정류장에서 내려 달천을 따라 걸어 올라오거나 하면 된다. 거리는 짧지만 그 길을 따라 전개되는 충주 이야기는 다른 어느 곳보다 넘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왜군에 의해 점거된 충주는 그들이 둔병(屯兵)하며 달천 가에 수차(水車)를 설치해 달천뜰에 물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충주에 놀러와 4군(제천, 청풍, 단양, 영춘) 유람을 다녀온 선비들이 여행에 동행했던 충주 기생과 이별하고 달천나루를 건너 돌아보며 거기 있던 바위에 세 남자가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하여 ‘교리석(校理石)’으로 불리던 바위도 있었다고 한다.
사문(斯文) 안(安)ㆍ권(權) 두 선비가 충주(忠州)로 향하려 할 때 안(安)은 노(盧)의 집에서 푸른 구슬로 만든 갓끈을 빌리고, 권은 박(朴)의 집에서 자줏빛 띠[帶]를 빌렸는데, 안의 별명은 연취(鳶鷲)라 하고 권의 별명은 봉시관(奉時官)이라 했다. 권은 항상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충주에 이르러 안은 기생 죽간매(竹間梅)를 사랑하고, 권은 기생 월하봉(月下逢)을 사랑하였다. 4군(郡)을 두루 다니며 수십 일을 지내다가 달천(獺川)가에서 이별하며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사문(斯文) 금생(琴生)도 옆에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이 앉아 있던 돌을 ‘교리석(校理石)’이라고 한다. 사문(斯文) 유공(柳公)이 시를 짓기를,
고삐를 나란히 하고 재갈을 연하여 화산을 떠나는데 / 竝轡聯鏕發華山 예성을 동쪽으로 바라보니 길은 멀도다 / 蕊城東指路漫漫 자줏빛 박의 띠는 허리를 두른 것이 가늘고 / 紫芝朴帶圍腰細 푸른 구슬 노의 갓끈은 얼굴에 비쳐 싸늘하도다 / 靑玉盧纓照臉寒 대나무 사이에 날개를 펴니 목마른 독수리가 다다른 듯하고 / 張翅竹間臨渴鷲 달빛 아래 수염을 내미니 봉시관이로다 / 掀髥月下奉時官 수십 일 동안 운우(남녀간의 사랑)로 남의 웃음거리요 / 數旬雲雨供人笑 4군의 풍류는 빼어난 구경거리라네 / 四郡風流絶勝觀 배 위에서 두 낭군 눈물을 뿌리며 헤어지고 / 船上兩郞揮淚別 밭 두둑 길에 두 기생은 노래부르며 돌아가도다 / 陌頭雙妓放歌還 우습도다 금공은 어떤 손이길래 / 堪笑琴公何許客 병신처럼 이별을 함께 서러워하는고 / 籧篨同作別離難 하였다. (성현, 『용재총화』제6권)
교리석은 사라져 찾을 수 없다. 작년까지 달천다리 옆에 있던 네 기의 선정비도 사라졌다. 단월동과 달천동에 있는 선정비류 여덟 기를 단월다리 옆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아쉽다.
짧지만 이야기가 많은 곳, 역사적 사건이 겹쳐지는 곳, 충주라는 이름이 들어간 첫 시가 씌어진 곳,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있는 곳, 충주에서도 가장 붐볐던 단월역이 있던 곳 등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지만, 정지상의 시 세 편을 각색하여 <분행역에서 보내 온 편지>로 다시 정리하며,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의 10회에 걸친 연재를 마치며 달천나루를 건넌다. 아니, 달천다리를 건넌다.
구백년을 지나 천년이 되어 간다. 그는 남행하였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주 단월역에서 하룻밤 쉬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말을 달려 죽산의 분행역으로 향했다. 그를 호위했던 인편에 충주자사에게 편지 한 통을 주어 보냈다.
분행역에서 충주자사에게 보냅니다.
어제 저녁 영곡사(靈鵠寺) 앞을 지나 단월역에 들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영곡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 아래 강가에 멈춰 한참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천 길 바위 머리에 천 년 묵은 절은 앞은 강물에 임했고 뒤는 산에 기댔더군요. 초저녁 하늘 위로 별에 닿을 듯 세 뿔이 솟은 집은 반쯤 허공에 솟았는데, 단칸이더이다.
말을 재촉하여 단월역에 들어갔더니 자사께서 나와 계셨죠. 후한 대접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곁들인 반주에 취해 잠들었더니 나직한 병풍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단잠에 취해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앞 마을에서 첫 닭이 울었지요. 문득 생각하니 어제 깊은 밤에 구름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방문 열고 내다 보니 새벽 하늘은 푸르게 서늘했고, 단월역 계월루 서편에 새벽 쪽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새벽같이 길을 떠난 저는 지금 분행역루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엊저녁에 영곡봉 앞 길을 지났는데, 여기에 오르니 봄이 한창입니다. 벌의 터럭발짓에 간지럼 타던 꽃은 끝내 몸을 뒤틀며 붉은색을 반쯤 토해내고, 봄이 되어 돌아온 꾀꼬리란 녀석이 긴 여행에 피곤한 나래를 버드나무에 숨기고 쉬다가 헛기침을 합니다. 그 소리에 가만히 봄물을 빨아올리던 버드나무가 사레들린 듯 연두연두하던 여린 잎이 순간 진초록으로 변합니다. 충주 연당의 봄 풍광도 그렇겠지요?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연당 정자에 앉아 무궁한 봄빛에 흥을 즐기겠건만, 천리의 사신으로 나온 몸인지라 돌아갈 마음만 바빠 제대로 인사도 못드리고 왔습니다. 머리 돌려 중원을 바라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려앉은 흰 구름과 나무만 빽빽합니다.
충주자사 직임을 마치시고 개경으로 돌아오시면 한번 봅시다. 엊저녁에 베풀어 주신 후한 저녁 대접에 답하리다. 임기 내내 충주 사람들 편히 살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충주자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평양에 큰 변이 있었다.(1135년, 고려 인종 13년) 그것을 역사는 ‘묘청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 역모 사건에 관련된 중요 인사로 지목된 그는 죽임을 당했고, 그의 주옥같은 글을 담은 문집 <정사간집>도 모조리 불태워졌다. 묘청의 난을 두고 신채호 선생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그는 그렇게 역사상 반역자로 죽었지만, 그가 남긴 글은 20편 정도 살아남아 천년이 지난 지금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 중에서 ‘영곡사 → 단월역 → 분행역’으로 이어지는 어느 봄날의 이틀 여정은 충주에서는 재평가해야 될 귀중한 콘텐츠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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