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월역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 흔적에 대한 어떠한 표식도 없다. 하지만 충주에서 가지는 단월역의 위상은 그 어느 곳보다 돋보인다. 단월역은 사라졌지만, 단월에서 지금 가장 유명한 곳이 충렬사(忠烈祠)이다. 다만, 사람들은 충렬사는 알지만, 충렬서원(忠烈書院)은 잘 모른다.
1871년 5월 9일(고종 8년 음력 3월 20일)에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며 전국에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수백여 개의 서원이 훼철되었다. 이때 훼철에서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의 한 곳이 충렬서원이다. 역사적 사건의 단어로 존재하는 서원철폐령과 관련하여 충렬서원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의외로 간단하다.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을 모신 사당’ 정도가 일반의 상식이다.
맞는 얘기다. 임경업 장군을 배향한 곳이 충렬사이다. 충렬사는 제사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일반적으로 제사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나뉜다. 배향하는 인물을 모신 제사 공간과 배향 인물을 본보기로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 공간을 갖춘 곳이 곧 서원이다. 공간 구조는 향교와 유사하다. 향교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의 5성현의 위판을 모시던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 공간을 문묘(文廟)라 하고, 신문(神門)을 경계로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書齋)를 분리하여 교육 공간을 배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서원도 그와 유사한 건물 배치를 하였고, 제사와 함께 지역 인재 교육 기관으로서의 순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충렬서원의 흔적 또는 면모를 찾을 수 있는 건물이 충렬사강당(忠烈祠講堂)이다. 예전에는 충렬사 사당 앞 중앙에 위치했지만, 1970년대에 정화사업 명목으로 공간 정비를 하면서 ‘어제달천충렬사비’와 마주 보는 것처럼 이전해 놓았기 때문에 충렬서원의 공간 구조가 깨졌다.
충렬사의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46년 (음) 6월 17일(인조 24) 임경업의 죽음 1697년 (음) 12월 9일(숙종 23) 임경업의 복관 1698년 (음) (숙종 24) 충렬사 준공(지역 유림들이 재원을 모아 세움) 1706년 (음) 2월 5일(숙종 32) 임경업에게 시호를 내림 : 忠愍 1726년 (음) 4월(영조 2) 임경업 유상의 모사(영중추부사 정호와 판중추부사 민진원의 주도) 1727년 (음) 6월 5일(영조 3) 임경업 사우에 사액(賜額) : 서원전토(書院田土) 하사 1775년 (영조 51) 충렬사강당 건립 계획(지역 유림의 출연) 1777년 (음) 6월 9일(정조 1) 충렬사강당 상량식 1778년 (음) 4월 20일(정조 2) 충렬서원의 대대적인 수리 결정과 지시(중앙의 5영에서 800금을 출연하여 자금 지원) 1779년(정조 3) 사우, 강당, 안담, 신문 완성 후 대기근으로 공사 중단 1782년 (음) 9월 말(정조 6) 충렬서원 완성(충렬사강당의 준공 및 부속 건물 완성) 1784년 (음) 11월 3일(정조 8) 임경업의 형 임형업에 대한 정려 1788년 (음) 5월 26일(정조 12) 정조의 선시(宣諡) 1788년 (음) 11월 14일(정조 12) 부조지전(不祧之典) 지시, 계단과 담장과 원우의 수리 지시, 초상의 모사 지시, 수총(守塚) 3호의 획급 지시 1788년 (음) 11월 15일(정조 12) 의주의 사우를 현충(顯忠)으로 선액(현충사), 정표(旌表)를 변경 1789년 (음) 5월 26일(정조 13) <임경업실기>의 판각 지시 1791년 (음) 1월 28일(정조 15) <어제달천충렬사비>의 건립 결정 1791년 (음) 4월(정조 15) 쌍성각 준공(살미면 세성리 별묘 앞) 1791년 (음) 4월 26일(정조 15) <임경업실기> 편집 완료, 간행 반포 지시(전 5권) 1791년 (음) 7월 21일(정조 15) <어제달천충렬사비> 건립 사업 지시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는 1689년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1727년에 사액되며 서원전토가 내려졌다. 하지만 아직 교육공간의 중심인 강당은 준공하지 못했다. 그것을 아쉬워하던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775년에 충렬사강당 건립 계획을 세웠고, 정조 즉위년인 1777년에 충렬사강당 상량식을 가졌다. 이후 정조 재위시에 충렬사와 충렬서원, 그리고 임경업 장군에 대한 대대적인 현창사업이 진행되었다.
당초에 지었던 사당인 충렬사는 1970년대 정화사업 과정에서 해체되고, 대신 콘크리트 건물로 맞배지붕 대신 팔작지붕을 얹은 새 건물로 바뀌었다. 규모 또한 이전에 비해 훨씬 커지며 전통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위치를 옮긴 충렬사강당은 옛 건물의 모습을 간직함과 동시에 대청에 걸린 여러 개의 중수기를 통해 충렬서원의 변모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779년에 중수를 하며 공사를 감독한 이적(李迪, 미상)은 공사를 마치고 그 소회를 적은 시 한 편을 남겼다.
<중수운(重修韻)>
慷慨平生不有身 한평생을 강개로 자신을 잊었으나 丈夫百歲始知眞 백년 지나 장부의 진심을 비로소 알겠도다. 規模返窄三擎地 삼경지(三擎地)로 규모는 도리어 협착하나 節義爭傳一介臣 한 신하의 절의(節義)는 다투어 전하누나. 終古達川流不盡 예로부터 달천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至今菱谷氣惟新 이제 능곡(菱谷)의 기개가 새로워라. 千金寵賜修遺廟 천금을 하사하여 묘당(廟堂)을 수리하니 執藝無勞大小人 일하는 사람들은 괴로움이 없었어라. - 이적, 『임충민공실기』(1890), 시.
이적의 소회를 통해 충렬사가 자리한 곳이 단월 안에서도 능곡(菱谷)으로 불리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1782년에 준공되었다는 충렬사강당을 바라보면 처마 밑에 흰코끼리 상이 대칭으로 조각되어 있다. 충렬사강당 상량문에는 ‘기둥을 우뚝 세운 모양은 공의 지조와 절개[志節]를 떠받친 것이고, 너른 천장의 처마 지붕에 코끼리를 넣은 것은 공의 기개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隆棟屹立像 公志節之榰 天廣廡洞開象 公氣宇之蓋)’ 라고 하여 튼튼한 주초에 세운 기둥과 코끼리상을 조각한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충렬사에 들러서 임경업 장군 영정 앞에 향 하나 올리고 돌아 나와 충렬사강당 처마 밑에 새긴 흰코끼리와 맞은 편의 어제달천충렬사비와 부인 이씨의 정절비각을 둘러보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리고 유물전시관에 진열된 각종 교지와 추련도(秋蓮刀), 충렬사와 충렬사강당 사액 현판을 보며 아쉬움을 더한다.
온전한 것처럼 보이는 충렬사 공간은 이름만 남아 있는 듯하다. 상상해야 보이는 공간의 낯섦은 차치하더라도, 들어서는 입구에 홍살문 하나 없는 허전함은 어떻게 채워야할까?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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