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5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6/07 [12:38]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5

김희찬 | 입력 : 2024/06/07 [12:38]

 

▲ 유주막터와 유래비  © 충주신문

 

▲ 유주막 삼거리의 갈림길  © 충주신문

 

▲ 상단마을  © 충주신문

 

▲ 상단마을 느티나무  © 충주신문

 

▲ 상단마을 갈림길과 충렬사  © 충주신문

 

▲ 단월에 있는 달천동행정복지센터(단월역 자리)  © 충주신문

 

짙은 녹음(綠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영곡사 산신각을 다시 쳐다보고 이내 천년 묵은 발길을 옮겨 유주막(柳酒幕)으로 향한다. 지난 겨울 달천에 고니가 헤엄한다는 소리를 듣고 몇 번 찾았지만, 나는 고니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지인이 보내 준 사진 몇 장으로 겨울에 고니가 찾는 것은 확인했지만 다음 겨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흐드러진 능수버들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단월 정수장 쪽으로 난 예자한칸의 옛길을 만난다. 1959년부터 충주에 수돗물이 공급되었다. 단월 정수장에서 취수ㆍ정수한 수돗물은 ‘달래수’로 부른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인 기우자(驥牛子) 이행(李行, 1352~1432)이 물맛을 평하면서 달천수(達川水)를 제1로 삼았다는 명성을 이은 것으로 여겨진다.

 

단월 정수장이 들어서기 전에 그곳은 ‘유주막(柳酒幕)’이라고 불리던 주막이 있었다. 팔봉 마을을 중심으로 수회 쪽의 ‘도로고개’와 짝을 이루며 팔봉 마을에 살았던 유영길(柳永吉, 1538~1601)과 그의 동생 유영경(柳永慶, 1550~1608)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소북파의 영수였던 유영경이 형을 찾아 팔봉 마을에 가던 길목이었던 주막은 유영경에게 줄을 대기 위한 이들이 진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유주막이 되었다는 얘기다.

 

정수장 앞의 옛길을 지나면 6차로의 널찍한 길을 만난다. 신호를 기다려 길을 건너면 상단 마을이다. 마을비와 정자를 지나면 다시 옛길을 걷는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길이지만, 그 길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때는 1592년 6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일(李鎰, 1538~1601)을 순변사(巡邊使)로 급파한 직후, 다시 신립(申砬, 1546~1592)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아 충주로 내려보냈다. 상주로 내려간 이일은 1592년 6월 4일에 왜군 1번대에게 패하여 충주로 도망왔고, 6월 5일에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모인 병력을 단월역 근방의 언덕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신립이 애초에 진을 친 곳이 상단 마을 뒤편 야산이었을 것이다.

 

상주에서 하루를 쉬며 정비한 왜군은 6월 6일에 문경까지 진격했고, 단월역 근방 언덕에 진을 쳤던 조선군은 탄금대 앞으로 진을 옮겼다. 6월 7일 새벽에 문경을 출발한 소서행장(小西行長, 미상~1600)이 이끈 왜군 1번대는 노루목을 빠져나와 영곡사 앞을 지나 좁다란 상단 길을 걸어서 도착한 단월역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정오 무렵으로 탄금대 앞에 진을 친 신립이 이끈 조선군과의 일대 결전을 준비했다. 그때 왜군 1번대의 병력 규모가 18,000명이라고 한다. 유사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한 날 한 시에 이 길을 걸었다.

 

오래된 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오래된 나무를 만난다. 상단 마을을 지나는 중에도 농수로 건너편으로 두 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두 느티나무를 지나 조금 걸으면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오른쪽 야산 밑으로 굽은 길이 옛길이고 논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이 새로 생긴 길이다. 갈림길에서 앞을 보면 오른쪽 산자락 아래에 한옥 건물이 보인다. 충렬사(忠烈祠)이다. 충렬사가 있는 마을을 보통 단월이라고 한다.

 

지금은 충렬사가 단월의 상징처럼 자리한다. 충렬사가 있는 마을은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가 생긴 이후 원룸촌으로 변했다. 하지만 단월은 충주에서 오래된 마을 중의 하나다. 마을의 첫 시작은 모르지만, 단월역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역원조에 기록된 단월역은 옛날 단월부곡(丹月部曲)이었다고 하였다.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으로 구분되던 삼국시대 이후의 마을 개념에서 충주에 존재했던 곳 중에 단월은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러한 곳을 부곡으로 불렀던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다. 하지만, 단월역의 공간 위치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작년까지 단월역 안내판이 유주막 자리에 있었다며 엉뚱한 곳에 세워 두었었다.

 

역사적으로 충주에 존재했던 몇 개의 역 중에 단월역은 가장 붐볐던 역이다. 남쪽으로 연풍의 안부역(安富驛)과 서쪽으로 용안역(用安驛), 서북쪽으로 가흥역(可興驛), 그리고 연원도의 본역이었던 연원역(連原驛)과 연결된 노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정확한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는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충주의 연원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원도(連原道)의 속역을 확인하며 역 자리를 추정해 왔다. 읍지류의 기록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진행된 지적원도를 재구성하여 위치 확인을 진행했다. 그 결과 단월역은 지금의 달천동 행정복지센터와 단월초등학교 운동장을 중심 공간으로 위치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설명하더라도 현장에 아무 표식도 없기 때문에 단월역을 전제하고 둘러보려 해도 알기 쉽지 않다.

 

단월역이 붐볐던 만큼 단월역과 관련된 시도 많다. 충주에서 몇몇 특정 공간에 대한 시가 많은데, 그러한 공간을 제영 공간이라고 하고, 해당 공간에 대해 지은 시를 제영시(題詠詩)라고 한다. 탄금대가 가장 많은 제영시가 있는 곳이라면, 단월역이 그 다음이다. 그 중에서 <영곡사> 시에 이어 충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시라고 할 수 있는 정지상의 시를 시작으로 조선시대 전시기를 통해 제영시가 지어졌다. 특히 한시의 전통에서 앞 사람이 지은 시의 운을 이용해 지은 차운시(次韻詩)의 전통이 처음 보이는 곳이 단월역이기도 하다.

 

역의 규모를 공간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역에서 보유했던 말의 수효와 종사자의 수로 짐작할 수 있다. 『여지도서』 충원현지의 역원조에는 대마가 2필, 기마가 7필, 질마가 5필이고, 단월역에서 종사한 역노가 110명, 역비가 8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780년 전후 상황을 기록한 것이지만 말과 역노비에 대한 기록은 대동소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월역은 기본적인 역 기능은 물론 발참(撥站)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발참이라고 하면 파발마(擺撥馬)를 연상하면 되는데, 선조 30년(1597)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파발마를 갈아타던 기발(騎撥)은 25리마다 하나씩 설치하였고, 발장 1인, 군정 5인, 말 5필씩을 두었었다. 단월발참과 연결된 곳은 가흥발참과 수회발참으로 역로와 같은 길을 이용하였지만 긴급한 공문서의 전달을 위한 중간 기착지 기능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월은 기본적으로 역과 함께 성장해온 마을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살펴야 될 부분이 절이다. 지금은 단호사라는 절이 있지만, 고려시대까지 불교가 문화ㆍ종교의 중심을 이루었고, 동시에 역과 원이 설치된 곳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연원도처럼 새재를 너머 문경ㆍ상주를 중심으로 기능했던 유곡도(幽谷道)의 중심역이었던 유곡역(幽谷驛)의 마을 구조를 보면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유곡역 마을은 앗골[衙洞], 마본리(馬本里), 주막동(酒幕洞), 신대(新垈)와 함께 대사동(大寺洞) 등 5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유곡역 찰방이 근무하던 앗골과 마구간이 있던 마본리, 일반 여행객이 묵었던 주막동, 이용객이 증가하며 확장된 새터를 기본으로 절이 따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이 가졌던 기본적인 형태조차 파괴된 단월역이지만, 읽어내야 할 사실이 많다. 단월역을 중심으로 있었던 다양한 사실과 현상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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