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정지상(鄭知常, ? ~ 1135)에 대한 명성은 <송인(送人)>에서 시작됐다. 평양 대동강 남포를 배경으로 쓴 시가 교과서에 소개된 것을 접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시 작품 중에 남은 것은 많지 않다. 17편의 시가 겨우 남아 전해진다.
평양을 배경 공간으로 쓴 시가 <송인(送人)>(① 오언율시), <송인>(② 칠언절구>, <서도(西都)> 등 3편, 개성을 배경 공간으로 쓴 시가 <장원정(長源亭)>(① 오언율시), <장원정>(② 칠언절구), <개성사 팔척방(開城寺八尺房)> 등 3편, 경주를 배경 공간으로 쓴 시가 <백률사(栢栗寺)>, 창원을 배경 공간으로 쓴 시가 <월영대(月影臺)>, 전북 부안의 내소사를 쓴 <제 변산 소래사(題邊山蘇來寺)>, 경기 안성의 분행역에서 쓴 <분행역기충주자사(分行驛寄忠州刺史)>, 충주를 배경 공간으로 쓴 <영곡사(靈鵠寺)>와 <단월역(丹月驛)>, 그 외에 <춘일(春日)>, <제 등 고사(題登高寺)>, <고향의 여러 어른들께 부쳐[寄故鄕諸老]>, <취후(醉後)>, <신설(新雪)> 등 장소를 특정하기 애매한 시편을 포함하여 모두 17편이다. 그 외에 표전(表箋)이 2편, 치어(致語)가 1편, 소(疏)가 1편 있다.
<영곡사>는 지금 이름이 <정심사>이다. 충주시상수도사업소에서 옛 강변길을 따라 가며 왼편 골짜기 중간에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자리한 절이다. <영곡사>의 경우 고려 후기 시인 진화의 <영곡사>가 한 편 더 있다. 그리고 중종 19년(1524)에 충주목사를 역임한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시에 ‘靈鵠寺有鐵爐 十二官吹鍊所’라고 적어 놓았다. 즉 영곡사에는 12관(약 45㎏)의 쇠를 불려 만든 쇠화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단월역>은 단월 충렬사 입구의 신호등을 중심으로 주민센터가 들어선 자리를 중심으로 있던 주요 역의 하나였다. 거기에는 계월루(溪月樓)라는 2층 누다락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충주를 지나갔던 서거정(徐居正)의 차운을 시작으로, 양희지(楊熙止)는 단월역에서 홍귀달(洪貴達)을 만나 정지상의 운으로 지은 시를 이별의 정표로 주었다. 특히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은 당시 목사 박상과 만나 정지상의 시에 차운하여 5수를 지어 건넸고, 다시 조령을 넘으며 5수를 더 지어 박상에게 보내는 일도 있었다. 시의 천재가 지은 시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한편 <단월역>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대허(大虛) 최하림(崔河臨)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후, 퇴계 이황이 뒤따랐고, 이어 충주목사 박상을 비롯한 차운이 계속되어 19세기 이희발(李羲發)에게까지 이어졌다.
역이 존재하며 역으로서 기능함과 동시에 그곳에 묶는 여러 인사들이 앞 사람의 시에 차운하며 이어진 시의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에는 단월역의 모습 뿐아니라 주변의 풍광, 영곡사, 또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인연과 사건 등 다양한 장면들이 포착된다.
<분행역기충주자사>는 그 장소가 경기도 안성지역이지만, 충주라는 지역의 이름이 시작품에 처음 등장한 예이다. 그리고 그 시에는 충주읍성 내의 연당과 관련된 압축된 시어 14자에 녹아있는 봄 풍광이 오롯하다.
개별 장소, 공간을 두고 보면 각각의 특징과 역사성이 있다. 이를 지역 전체적인 공간으로 확대해 보면, 조령 또는 하늘재를 경계로 신니면 모도원까지 이어진 역원(譯院)을 따라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곡사>와 <단월역> 뿐아니라, <안보역>, <안보온천>, <수회참>, <단월역>, <달천참>, <대소원>, <용원역>, <숭선참>과 <모도원>으로 연결되는 땅길의 맥이 잡힌다. 각 장소에서 지어진 수많은 시편들은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개인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십 수백 편, 수십 수백 명이 천 년 넘는 시간을 지나오며 남긴 흔적은, 곧 그 원형 콘텐츠에서 비롯된 파생 콘텐츠인 동시에, 당시의 상황을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지층이 되기도 한다.
그 시작에 놓여있는 정지상이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올 때 조령을 지났는지, 하늘재를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 고려후기의 인사들이 남긴 시편에서 발견되는 몇몇의 경우 주로 하늘재를 넘어와 미륵대원 또는 미륵원에 머문 흔적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최소한 안보역에서부터 충주를 통과하는 구간에 있어서 단월역까지는 현재 추적 가능한 확실한 길이다. 단월역에서는 다시 탄금대 금휴포나, 가흥창에 가서 배편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육로로 정지상이 갔던 길을 따라 분행역을 거쳐 서울로, 개성으로 갔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천년 넘은 오래 된 도시의 통로였던 길에 흩뿌려진 첫 작품인 정지상의 시편은 그래서 중요하다. 오래 된 콘텐츠의 재해석과 활용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낭만과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의 현재 모습은 오래 된 묵은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제도의 폐지에 따라 변모된 공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도 제대로 표시, 설명이 없는 점은 안타깝다. 단순한 한 지점이 아닌, 점과 점을 연결하여 이어진 땅길의 역사와 이야기는 어떻게 정비하고 가공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되살릴 수도, 없앨 수도 있다. 단기간의 성과주의로 접근할 경우에 가져올 모순도 고려하면서 땅길의 가치와 도시의 역사성을 함께 찾아볼 수 있는 오래 된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한층 필요한 때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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