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바뀌었다고 해서 지역에 당장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변화의 중심이 되는 곳을 제외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그런 동네에서는 나라가 바뀐 사실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며칠 전 다른 이유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보물 제16호)에 갔다왔다. 그리고 갑자기 충주에서 조선의 시작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왜냐하면,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었을 것 같던 그 탑비가 조선이 들어서기 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392년 전후의 충주와 관계된 사서의 기록을 몇 가지 들춰봤다.
① 1390년 고려 공양왕 2년 12월조
“국사(國史)를 충주(忠州)로 옮겼다. 그 전에는 죽주(竹州)의 칠장사(七丈寺)에 보관하였던 것인데, 이 번 여름에 왜적이 침입하였으므로 이것을 옮긴 것이다.” (<고려사> 권 제45)
② 1391년 고려 공양왕 3년 5월 12일자
“무술(戊戌)에 이림(李琳)을 충주(忠州)에, 강유인(姜仁裕)를 풍주(豊州)에, 왕흥(王興)을 청주(淸州)에, 신아(申雅)를 전주(全州)에 유배하였다.” (<고려사> 권 제46)
③ 1393년 조선 태조 2년 11월 12일자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했는데, 경상도는 계림(鷄林)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김해(金海)ㆍ경산(京山)이고, 전라도는 완산(完山)ㆍ나주(羅州)ㆍ광주(光州)이며, 양광도는 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수원(水原)이며,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는 원주(原州)ㆍ회양(淮陽)ㆍ춘주(春州)ㆍ강릉(江陵)ㆍ삼척(三陟)이며, 서해도(西海道)는 황주(黃州)ㆍ해주(海州)이며, 경기좌도(京畿左道)는 한양(漢陽)ㆍ철원(鐵原)이며, 우도(右道)는 연안(延安)ㆍ부평(富平)이다.” (<태조실록> 태조 2년 11월 12일 계유)
이외에 1392년 (음)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음)8월 23일 기록에 이숭인, 이종학, 우홍수의 졸기가 실렸다. 거기에서 이숭인[李崇仁, 1347년(충목왕 3) ~ 1392년(태조 1)]이 ‘경오년(1390) 여름에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로써 체포되어 청주(淸州)에 갇히었다가, 수재(水災)로 인하여 사면되어 충주(忠州)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1393년 (음)7월 22일자의 개국 공신 책록 교지에 ‘충주절제사(忠州節制使) 최공철(崔公哲)’의 현직과 이름이 보인다. 충주의 시위군(侍衛軍)을 지휘한 실세로서 태조 이성계의 측근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지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충주중원지>(1985)나 <충주시지>(2001)의 경우에 ‘태조(太祖) 원년(1392)에는 고려시대의 제도와 예성(蘂城)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태조 4년(1395) 개경(開京)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로 개칭하고, 도감영(道監營)을 충주에 두고 관찰사(觀察使)를 배치했다.’라는 연혁과 함께 조선시대 충주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안정적인 충주 여건의 반영>
‘1390년 12월에 국사(國史)를 충주로 옮겼다’는 것은 고려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를 옮긴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고려 말에 왜구의 빈번한 침입과 관련된다.
1379년(우왕 5) 9월에 왜구가 경남 일대에 침입해오자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던 역대 고려왕조의 실록을 선산(善山)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다. 그러다가 1383년 6월에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실록을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왜구가 침입해오자 1390년 12월에 개천사로 옮긴 것을 기록한 것이다.
태종 12년인 1412년 4월 3일자 기록에 ‘충주사고(忠州史庫) 형지안(形止案)’이 언급된다. 또한 1414년(태종 14) 6월 1일에 충주사고 포쇄별감으로 떠나는 오선경(吳先敬)을 전송하며 쓴 윤회(尹淮)의 <충주 포쇄별감 오봉교 선경을 전송한 시의 서문[送忠州曝曬別監吳奉敎先敬詩序]>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1390년 12월에 동량면 하천리 개천사로 옮겨진 고려의 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서적이 조선 개국 초기에 충주읍성 내에 별도의 건물로 옮겨져 충주사고(忠州史庫)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것은 1393년에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할 때에 충주가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해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하고, 또한 왜구의 침입에서 먼 거리의 안정적인 여건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조선(朝鮮), 국호의 개정과 충주, 그리고 대지국사탑비>
1388년 (음)5월 22일 위화도 회군이 결행되며 시작된 이성계의 본격적인 행보는 1392년 (음)7월 17일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며 태조실록의 첫 장이 씌어진다. 그 해 윤 12월 9일 국호 개정을 승인받기 위해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을 명(明)에 파견하였다. 1393년 (음)2월 15일에 한상질이 돌아왔고, 승인받은 국호 ‘조선(朝鮮)’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동시에 강도와 절도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 대한 사면과 함께 새로운 나라 조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이 날로부터 충주도 조선의 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작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충주의 역대 목사와 관찰사를 정리한 <충주목 선생안(先生案)>(김현길 편저, 수서원, 2012)에도 태조 시기의 충주목사로 ‘심덕부(沈德符), 류구(柳玽), 김사형(金士衡), 하자종(河自宗)’ 등 4명 정도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재임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는 <억정사지(億政寺址)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가 있다. 보물 제16호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보물로서의 가치 외에 지역적으로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이 탑비는 1328년 (음)1월 8일에 태어난 한찬영(韓粲英)이 14살 때 서울(漢濱) 구경을 왔다가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출가해 1390년에 억정사에서 63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생애를 적고 있다. 이 탑비는 1393년 10월에 세워졌다.
지역적으로 이 탑비가 눈여겨지는 부분은 두 곳이다. 탑비의 제목인 첫 줄에는 ‘有明朝鮮國忠州億政禪寺故高麗王師諡大智國師碑銘 并序’라고 씌어 있다. 즉 조선이 개국되고, 조선이라는 국호가 개정된 후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충주가 된 첫 사례이다. 이후에 세워지는 유명한 비석의 대부분은 ‘有明朝鮮國’으로 시작된다. 그러한 예의 처음이 충주에서는 이 탑비에서 보인다.
대지국사의 일대기를 새긴 앞면과 함께 탑비의 뒷면에는 관계자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문도(門徒)로 대선사(大禪師) 12명, 소선사(小禪師) 33명, 중덕(中德) 17명, 대선(大選) 25명, 운수(雲水) 32명, 참학(參學) 6명과 속문도(俗門徒) 24명, 건비관사원(建碑管事員) 5명(2명 중복), 그 외에 비문을 지은 박의중(朴宜中)과 글자를 새긴 혜공(惠公), 탑비의 주인공인 대지국사까지 도합 155명의 이름이 있다. 속문도 중에는 태조 때에 충주목사를 역임했다는 심덕부의 이름도 보인다. 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시중(侍中)으로 확인된다. 또한 억정사의 대선사로 등장하는 죽암(竹菴) 진공(軫公)과 교분이 깊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4편의 시를 남기고 있는 동시에, 이 탑비에 속문도로 기록돼 있다. 당시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있었다.
그 중에 끝에 새긴 관직과 이름에서 다시 한 번 1393년 충주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忠州 / 牧使 李希桂 / 判官 安智寶’라는 새김이 이 탑비의 끝이다. 1393년 10월 당시 충주 목사와 충주 판관의 이름이 이 탑비에서 확인된다.
조선의 한 곳인 충주, 그 흔적과 시작이 현재로써는 이 탑비에서부터 기록되고 있다. 이는 또한 충주에 새겨진 첫 ‘조선’이기도 하다. 태조는 1398년 (음)1월 24일에 대지국사가 출가했던 중흥사와 입적한 억정사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1426년 (음)10월 27일에 세종은 혁파한 절 억정사의 토지를 평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조치했다.
고려왕조실록의 최종 안착지였던 충주는 그만큼 안정적이었거나 강력했을 수 있다. 그 상황에서 개천사(開天寺)라는 절이 등장한다. 조선이 개국하고 국호가 개정된 후의 첫 사례로 충주에서는 억정사(億政寺)가 등장한다. 아직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의 개국과 충주, 그리고 절집의 관계는 지역의 시각에서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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