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 냄새가 난다
질퍽이는 정거장 마당을 건너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합실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떠는 노인은
알고 보니 이웃 신니면 사람
거둬들이지 못한 논바닥의
볏가리를 걱정하고
이른 추위와 눈바람을 원망한다
어디 원망할 게 그뿐이냐고
한 아주머니가 한탄을 한다
삼거리에서 주막을 하는 여인
어디 답답한 게 그뿐이냐고
대합실은 어수선해져 더 썰렁하고
나는 어쩐지 고향 사람들이 두렵다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을지로 육가 행 시내버스를 탈까
육가에만 들어서면 나는
더욱 고달파지고
- 신경림, <시외버스 정거장>, 동아일보. 1972. 12. 2.
이 때만 해도 서울 충주간 버스는 너댓시간을 달려야만 했다. 특히나 완행버스는 들르는 곳이 많아 더욱 지루했다. 초겨울, 고향에 내려올까 정거장에 갔던 시인은 대합실에서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달달 떠는 노인을 보았다. 이웃한 신니면 사람이었다. 시인은 되돌아섰지만 아마도 노인은 버스를 타고 고향을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신니면 소재지 용원 차부에서 내렸을 것이다.
900여 년 전, 시인 정지상은 단월역에서 하룻밤 쉬고 용원역을 지나 경기도 안성의 분행역(分行驛)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충주자사(忠州刺史)에게 시를 한 편 지어 보냈다. 그 편지를 받아든 누군가는 용원을 지나 충주로 들어왔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무관이었던 노상추(盧尙樞) 일기에는 용원역이 여러 번 등장한다. 1778년(정조2) 윤6월 18일에 고향인 경북 선산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윤6월 26일에는 연풍 수촌점(水村店)을 출발해 10여 리를 가서 신점(新店)에 도착하니 비가 쏟아졌다. 아침밥을 먹고 20리를 가서 충주의 단월점(丹月店)에 도착하였다. 동행이 말을 먹이기 때문에 잠시 쉰 것이다. 비를 맞으며 달천을 건너 40리를 가서 용원역점(龍院驛店)에서 묵었다고 하였다. 2년 후인 1780년(정조4) 11월 19일에는 안보역(安保驛)에서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단월역에서 아침을 먹고 40리를 가서 용안역(龍安驛)에서 묵었는데, 날이 매우 추웠다고 하였고, 한 달 지난 12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양지참(陽智站)을 닭이 두 홰 째로 울 때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광암참(廣岩站)에서 말을 먹이고 70리를 가서 용안역(龍安驛)에서 묵었는데, 선전관도 이곳에서 묵었다고 하였다.
용원역이든 용안역이든 이 길을 지나며 들렀거나 묵었던 사람이 이들뿐이랴. 그러나 지금 용원은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기고, 충주를 동서남북으로 지나는 고속도로가 여럿 만들어지며 교통 오지의 한갓진 시골 면소재지로 남겨졌다.
신니면 소재지인 용원리에 있었던 용원역은 현장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과거 기록에서 찾아지는 흔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용원역은 연원역(連原驛) 소속으로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노(奴) 61명, 비(婢) 41명, 기마(騎馬) 5필, 복마(卜馬) 2필을 두었다.’(<호서읍지> 충주목 역원조)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연원역ㆍ단월역ㆍ안보역에 비해 종사자나 말의 수에 있어서 규모가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용원역의 운용 재원이 되는 역둔토와 관련해 1910년대의 토지조사부에서 국유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용원리에 있는 국유지 중에 밭은 40필지 39,641평, 논은 36필지 168,537평, 대지는 10필지 2,719평, 임야는 2필지 4,581평으로 확인된다. 총 88필지 215,478평으로 용원리 전체 546필지의 16.12%, 전체 면적 447,791평의 48.12%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 특히 논의 면적 비중이 높다. 용원리 전체 논 면적 271,018평의 62.19%를 차지하며 다른 역의 역둔토 소유와 차별되는 점이 특징이다.
용원역 자리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은 지적도 상에서 단일 대지면적 1,341평인 171번지가 유력하다. 이 자리는 신니면사무소 건너편의 용원리 26번지 구역의 대부분이 해당된다. 면사무소 앞의 4거리에서 신청리로 뻗은 길이 옛 용원역 자리를 동서로 절반 나눈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모두 지번이 분할되고 일반상업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일반상업지역이 용원역과 그와 관련된 대지들로 주택이나 상가가 들어서 있는 용원의 중심지역이다. 따라서 지금은 옛 역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용원역 자리를 찾는 중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확인된다. 1915년에 측도된 1:5만 지형도의 용원리 부분에 시장과 학교가 표시되어 있다. 文으로 표시된 학교는 용원초등학교의 전신으로 1913년에 세웠다는 용명서당(龍明書堂)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 유지였던 윤우영(尹宇榮)에 세우고 초대 교장을 했다고 한다. 이 학교를 다닌 초기 학생으로 소설가 이무영(李無影)과 시인 이흡(李洽, 또는 李康洽)이 확인된다.
‘이런 종류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나는 흡(洽)을 생각한다. 40년 전 까마아득한 옛날이 회상되기 때문이다. 그때 흡과 나는 한 서당(書堂)에 다니었고 15, 6세 때는 남산(南山) 기슭 잔디밭에 누워서 흡이 지은 시를 읽었고, 내가 소설이랍시고 쓴 것을 읽으면서 <문학론>을 했던 것이다. 원고지란 존재도 모른 때다. <실용편전(實用便箋)>이라는 편지 종이에 쓴 소설이었다. 무영(無影)이라는 아호(雅號)를 흡과 둘이서 지은 것도 이 고향(故鄕) 흡의 동리인 신의실(信義室) 앞 남산(南山) 기슭이었었다.’(이무영, 「무영(無影) 아직 젊소이다」, 『경향신문』, 1955년 8월 29일자 4면)
이무영의 회상에서 ‘한 서당(書堂)’이라고 한 곳이 곧 용명서당이다. 역이 있던 마을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다. 또한 용원은 정기 5일장이 열리던 중심 지역이었다. 또한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개설되며 상대적으로 서울과의 통로 중간에 위치했던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다른 곳보다 먼저 학교가 세워진 것은 아닌가 추정해 본다.
용원역은 현재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지만 용원역이 존재함으로써 역할했던 100년 전의 상황을 밝히는 일도 필요하다. 역 자리를 중심으로 장이 섰고, 또한 근대적인 사립학교도 설립되었다. 특히 1921년에 일제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는 용원공립보통학교의 시작점을 찾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예는 엄정면의 엄정초등학교가 전신이었던 사립 명신학교(明信學校)를 기준하여 1908년을 개교 연도로 연혁을 바로잡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용원역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역의 존재로 인해 성장 발전했던 과거 용원의 변화를 자세히 밝히는 것은 용원역의 위상을 다각도로 재해석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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