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20세기 전반기 수안보온천 변천 약사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26]

117. 20세기 전반기 수안보온천 변천 약사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26]

 

▶ 19세기 말의 흔적과 여건

 

수안보를 이야기하면 항상 온천(溫泉)이 따라붙는다. 그만큼 수안보의 20세기는 온천의 개발과 그에 따른 관광지로 변화, 성장을 배경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온천에 의한 수안보 상황을 단편적이나마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1892년의 ‘온정동 동규 절목’이다. 여기에는 ‘또한 온정[온천]이 있어서 아침에 왔다 저녁에 가는 무리들이 법을 어지럽히고 윤리를 흩트리는 것을 능사로 한다.(亦以溫井 朝聚暮散之類 亂法敗常爲一能事)’고 하여 온천을 찾는 외지인이 늘면서 생기는 폐단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1894년 5월 20일,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안보병참(옛 안부역, 안보동)이 문경시 가은면 오봉정을 근거지로 한 의병 노학수 부대에 의해 134호가 전소되고 동네 사람 3명이 죽는 일이 있었다. 돌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동네가 입은 피해는 20세기 온천 시대로 향하는 수안보의 형세 변화의 전단계로 읽힌다.

 

▶ 수안보 온천의 개량(1916년)

 

본격적인 온천 지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구체적인 사례가 1917년 단신 기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즉 1917년 1월 12일자 매일신보에는 괴산(槐山) 소식으로 ‘수안보에 재한 온천은 약 2백여년 전에 발현된 바이나, 그간 구조의 불충분하더니 거년(1916) 8월부터 동 면장과 개목(皆木;니마키) 헌병소장의 발기로 570여원의 동유재산(洞有財産)으로 대개량을 가하였는데, 목하 성황을 암상(暗想)하면 장래의 일대 승지가 될 희망이 유하더라’고 소개하였다.

 

이 때 온천의 유래와 운영 방식이 1923년 기사에서 확인된다. 즉 수안보 온천은 약 350~360년 전(1923년 기준)에 어떤 여자가 온천에서 변사한 후 귀신이 있는 온천이라 하여 샘물의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후 4~50년 지난 후 반신불수된 사람 하나가 온천욕탕 자리에 거적집을 짓고 약 100여일간 지내며 반신불수병이 전쾌되었다. 그 후 동리 사람들이 다시 영수(靈水)라 하여 온천 자리를 다시 파고 온천을 이용해 왔다. 그후 통을 짜서 욕좌를 고친 후에 남녀와 내선인을 구별하여 이용했다.(내선인 구별 및 다른 기사에서 융희 2년(1908)에 민간 유지의 기부로 다소 설비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1908년을 기준한 것으로 이해됨) 그리고 1916년 8월에 욕탕을 건축하여 운영하기 시작했고, 1921년 4월부터 내선인 구별을 폐지하고, 1등 2등으로 구별하여 입욕료를 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동리에서 온천을 경영하였으나, 지금(1923)은 상모면유의 재산으로 매 회계연도에 입찰하고 낙찰자에게 위탁경영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설 보수가 진행된 후의 큰 손님으로 1917년 8월에 당시 경기도 참여관이던 유성준(兪星濬)이 수안보온천에서 피서 여행을 하고 귀임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온천의 개발과 활용을 중심으로 수안보의 변화가 단편적이나마 구체적인 가늠을 할 수 있는 단서다.

 

▶ 기관 및 시설의 설치(1921년~1929년)

 

1921년의 수안보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3월 21일부터 수안보온천에 상모우편소(上毛郵便所)를 설치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상모면의 교육기관인 수안보공립보통학교가 수안보를 중심으로 한 면민들의 노력에 의해 4월 1일자로 설립 인가되었고, 11월 17일 신축 낙성식을 가졌다. 이어 1923년에는 충주 상주간 정기자동차 개통에 따른 온천욕객의 증가를 예상했다. 또한 1924년에 교통편리로 욕객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전화 불통에 따른 불편 민원을 계기로 전화선 가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1927년 8월에는 수안보시장, 즉 수안보장이 1ㆍ6일장으로 신설되기도 했다. 온천을 기반한 상모면의 중심지역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 [자료 : 매일신보. 1931. 10. 22.] 1931년 10월 수안보에서 개최된 충북북부5군연합 산미품평회에 맞춰 신축공사중인 성광관(星光館). 주인인 성야죽치(星野竹治;호시노 타케지)는 당시 충주 성내동에 성광관이라는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1934년 5월 14일에 우원일성(宇垣一成;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이 투숙하여 환취루(環翠樓)라 이름하며, 환취루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수안보온천랜드 자리이다. 

▶ 1930년대의 변화

연간 입욕객 4만여 명에 달하게 된 1930년, 40~50℃의 수온을 유지하던 온천의 수온이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수안보에 정착해 이엽여관(二葉旅館;후타바 료칸)을 경영하던 사도(寺島;테라시마)는 1930년 3월경, 여관 안뜰에서 4미터 가량을 팠으나 냉수가 나왔고, 다시 땅을 파 5월 4일에 44.5℃로 1시간 15석(石) 용출의 온천공을 파서 사업 정비를 계획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상모면 차원에서도 가을에 온천을 개수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늘어나는 욕객과 시설 낙후를 해결할 방법으로 괴산군이나 충북도 차원에서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柱式會社)의 위탁경영을 모색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1930년 12월에 충주에서 성광관(星光館)을 경영하는 성야죽치(星野竹治;호시노 타케지)와 위탁경영 계약을 체결하였다. 기간은 20년으로, 10년간은 수세로 1년에 500원씩 상모면에 납부하고, 10년 후에는 영업상태와 지방발전에 의해 증가 또는 증감할 것을 내용으로 했다. 또한 호시노는 총예산 3만원으로 총건평 200여 평, 2층의 근대적 설비를 갖춘 온천여관을 신축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과 함께 1931년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충북 북부 5군(괴산, 음성, 충주, 제천, 단양) 연합 산미품평회를 수안보온천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품평회를 기점으로 수안보의 성광관이 신축되었고, 부대 행사로 시문대회(詩文大會), 중선(中鮮)축구대회, 제4회 주류품평회, 위생전람회, 농회 주최 입직(叺織;가마니짜기) 경기회, 면 행정전람회, 중부조선 자전거 경주대회 등이 함께 열렸다. 도단위 행사이지만 상대적인 홍보효과를 통한 수안보온천의 변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존에 강원도 및 경북의 입욕객이 60%를 차지하던 것이, 1928년 말에 충북선의 충주 연장을 계기로 서울 경기 등 철도를 이용한 이용객의 증가와 충주와의 관계 증진 등이 도모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입욕객을 연 10만명으로 전망하는 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각종 규모의 행사가 수안보온천에서 개최되는 빈도가 늘었다. 온천 관광객의 증가 등에 힘입어 수입이 늘면서 1933년에는 연풍금융조합 구역내에 있지만 그 혜택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수안보지소를 신설하여 괴산군 상모면, 장연면, 충주군 살미면 일부를 지소 구역으로 하고 지소원(조합원) 500명을 확보하였다. 수안보금융조합이 시작된 것이다.

 

1931년 품평회 개최 직전의 수안보의 총호수는 300호(일본인 호수 10수호), 그 중에 여관 경영자 호수 40여호(일본인 3호, 조선인 30여호), 음식점 30여호로 온천과 관련한 직접적인 관련자가 35%에 육박하는 휴양ㆍ관광지역으로 변모해 있었다.

 

▶ 충주군 편입운동(1933년)

 

수안보온천이 활기를 띄면서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1933년 12월 5일에 괴산군 상모면 온천리 주민을 대표하여 천야팔태랑(川野八太郞;카와노 하치타로), 성야죽치(星野竹治;호시노 타케지), 좌좌목영조(佐佐木榮助;사사키 에이스케), 임순도(林淳道), 한상리(韓商履), 심만택(沈晩澤), 정영모(鄭英模), 홍원균(洪元均) 등 8명이 괴산군, 충주군, 충청북도를 각각 방문해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을 진정했다.

 

편입 진정의 이유는 ‘괴산군 상모면은 전조선적으로 자랑할만한 수안보 온천장을 소유하고 또한 다른 지방에 밑지지 아니할만한 천연의 미를 하였음으로 매일 욕객과 탐승인들의 답지로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되었으나 행정구역이 현재 괴산군인만큼 충주군과의 거리는 5리, 괴산군과의 거리는 10리 이상의 원거리, 그 뿐 아니라 충주간은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교통 두절이 아니 되나 괴산간은 조금만 비가 와도 몇 날씩 교통 두절이 된다.’는 것이 표면상 이유였다.

 

1933년말에 점화된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 운동은 1935년 9월에 재점화되었다. 1936년 전반기까지 대대적인 면민대회를 통해 결속하며 진정하였지만 인가되지 않았다. 괴산군과 충주군의 갈등 과제로 남아있던 이 문제는 1962년에 가서야 정리되어, 1963년 1월 1일자로 당시 중원군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을 하게 되었다.

 

▶ 새로운 온천공을 찾아서

 

1932년 11월에 충청북도에서 3천원을 보조한 굴착을 통해 43℃의 온천공이 개발됐다. 1934년 4월에는 수온 49℃의 새로운 용출구를 발견하여 본격적인 개발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5년에 와서 수온이 40℃로 낮아져 기존 80척의 온천을 300척 깊이로 굴착할 계획을 5월에 충청북도와 협의하고, 11월 27일에 착수했다. 이 당시 굴착한 곳이 성광관 동측의 약 300평 부지라고 한다. 1936년 1월의 진행과정을 소개한 기사에서 예정 깊이인 300척 중, 200척 지점에서 수온이 50℃로 용출량도 풍부하여 구정월(음력 1월)에는 일반 욕객에게 서비스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2월초에 300척을 굴착한 결과 52℃의 온천공이 개발되어 1일 8천석의 용출량을 보인다고 하여, 현재와 비슷한 50℃가 넘는 수안보온천의 명성이 유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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