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금) 오전 11시. 성내동의 구 충주교육지원청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 자문위원회가 있었다. (재)호서문화유산연구원이 충주시의 용역을 받아 5월 2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충주읍성 광장 및 주차장 조성부지 내 문화재 시굴조사(제2019-0533호)’에 대한 것이었다.
짧은 기간 중에 16개의 시굴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했던 충주읍성 성벽의 성돌을 대량으로 매입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어긋났다. 다만 연못의 흔적을 보여주는 뻘이라든가 연당의 벽구조로 추정되는 쌓은 호박돌과 같은 일부 유구가 확인되었다. 당일 현장에 지도위원으로 참여한 차용걸, 장준식, 길경택 등 3명은 해당 부지에 대한 일부 구간의 정밀조사를 통한 발굴조사 방향으로 의견을 정리하였다.
▶ 1915년 천운정(天雲亭) 사진의 재해석 연당과 관련한 자료를 많이 보아왔지만 우리가 제대로 읽지 못해 놓친 부분이 여럿 있음을 이후 자료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1915년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에 화보 사진으로 있는 ‘천운정(天雲亭)’에 대한 것이다.
이 사진에는 ‘천운정, 일명 육각당(六角堂)’이란 설명이 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앞의 천운정과 석가산(石假山)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에워 쌓던 연당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청녕헌(淸寧軒)으로 보이는 건물 지붕이 자리한다. 문제는 그 중간의 연결부인데, 즉 청녕헌 뒤쪽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있고, 그 옆에 못가에 초막 같은 것이 하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석가산에 이르는 통로로 돌을 쌓아 만든 좁은 길이 이어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배를 타고 석가산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직접 걸어서 석가산에 이르는 통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제대로 읽지 못했다
▶ 1912년 <충주시구개정도>에 반영된 연당 사진의 연결통로를 새로 읽어내니, <충주시구개정도>에 그려진 연당(蓮塘)의 구조가 이해된다. <충주시구개정도>는 1912년에 충주읍성 성벽을 훼철하여 신작로를 만들고, 또한 성서동과 성벽 주변을 일제의 중심 시가지로 만든 작업의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이 <충주시구개정도>는 측량을 통해 1/6,000의 축적으로 작성된 정밀지도이다. 측량에 의한 기록이기에 가상의 무언가를 임의로 그려 넣은 지도는 아니다. 청녕헌은 군청(郡廳)으로 표시되었고, 그 뒤의 왼쪽에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라고 하여 1907년에 신축한 교현초의 첫 학교 건물을 표시했다. 이것과 연결하여 사각의 선을 주었고, 그 중간에 육각형의 두 공간과 그것을 청녕헌 쪽으로 연결한 직선을 두었다. 외곽 육각형은 석가산(石假山)이고 안쪽 육각형은 천운정(天雲亭)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직선은 바로 천운정 사진에서 보이는 돌을 쌓아 만든 통로로 이해된다. 비슷한 시기에 만든 지도와 당시 사진이 서로 부합하며 연당의 공간적 구조와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 연당의 크기(둘레) 연당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871년에 작성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수록된 <충주목지(忠州牧誌)>에서 확인된다. 여기에는 ‘蓮塘一座, 在客舍東, 周回百步(연당 1좌, 객사 동쪽에 있다. 둘레가 100보이다)’라고 기록하였다. 1869년에 목사 조병로 주도로 충주읍성 수개축을 마친 후의 기록이다. 이것을 반영한 것이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로, 여기에는 동헌(東軒, 즉 청녕헌) 뒤에 천운정(天雲亭)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1915년의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문제는 100보인데, 당시 1보는 6척(尺)으로, 연당의 전체 둘레는 180~190m 규모로 추정된다. <충주시구개정도>에 표시된 둘레 모양을 따라 개략적으로 측정한 결과 약 185m의 둘레 길이가 나온다.
▶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 상의 기록
<충주시구개정> 계획에 의해 성벽을 훼철한 후, 1914년 11월 19일부터 1915년 3월 23일까지 측량작업이 있었다. 그것을 정리하여 1916년 8월에 충주군 충주면 충주읍 원도(原圖)라는 지적원도가 작성됐다. 이 지적원도에 근거해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가 정리되었다. 토지조사부에는 측량작업 전에 부여했던 가지번(假地番)과 지적측량에 의해 새로 부여된 지번(地番)이 있다. 그리고 지목(地目)을 밝혔는데, 사진과 <개정도> 공간에 대한 지번은 85번이고, 지목은 지소(池沼)로 소유는 국유(國有)이다. 정확하게 구 충주교육청 공간에 해당된다.
▶ 결론과 과제
몇 가지 자료이지만 꼼꼼히 보지 않은 탓에 그것의 상호 관계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최소한 천운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당(蓮塘) 공간은 사진(1915), <충주시구개정도>(1912), 지적도인 <충주읍 원도>(1916), 토지대장인 <토지조사부>(1916)에 의해 위치와 모양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 규모는 <충주목지>(1871)의 기록과 위치가 표시된 <충주목지도>(1872)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1869년의 충주읍성 수개축 이후에 정비된 상태의 충주읍성 연당의 모양과 위치는 발굴을 하지 않고도 확인이 가능하다. 정밀조사 또는 발굴조사가 추가로 진행된다면 반듯이 이 자료들을 종합해서 미리 충분히 예상하여 접근한다면 보다 성과있는 발굴조사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이 공간의 발굴을 통해 무엇이 확인되는가이다. 몽고침략기에 고려사에 등장하는 충주성(忠州城)과 전란 후의 수축 과정에서 예성(蘂城)이라는 별호가 내려졌던 공간. 그러나 그 이전인 1120년대 천재시인 정지상(鄭知常)이 그려놓은 연당 공간의 존재 연대와 사실관계가 매장된 유물을 통해 밝혀지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결국 역사시대 이래 충주의 중심공간, 즉 신라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그 답은 연당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발굴 공간의 확정을 위한 사전 검토가 중요하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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