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답사 관계로 수안보에 몇 차례 다녀왔다. 충주에서 들어가며 처음 만나는 곳이 물탕공원이다. 소망석 옆으로 4개의 비석이 있다. 수안보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를 기념한 ‘수안보초등학교 유지비(水安堡初等學校 遺址碑)’가 앞에 있고, 그 뒤에 ‘온정동 동규절목비(溫井洞洞規節目碑)’가 있다. 바로 이어서 ‘이장 오순영 시혜 불망비(里長吳順泳施惠不忘碑)’와 ‘면장 김영태 송덕비(面長金泳泰頌德碑)’가 나란히 서있다.
이 4개의 비석은 각각 놓고 보아도 되지만, 그 선후 관계나 내용의 관련성 등을 함께 살피면 지난 100년간에 있었던 수안보 변화의 중요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 온정동 동규 절목비
동규절목비는 ‘고사리면 온정동 동규절목’이라는 문서를 새긴 비석이다. 동규절목은 1892년에 온정동 주민들이 합의하여 만든 자치규약이다. 비석의 앞면에 한문 원문을 새겼고, 뒷면에 한글 번역문을 주었다.
이 비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온정동의 지리적 위치와 사정에 관해 서술한 대목이다. 절목서(節目序)에 ‘本洞處在嶺湖之間 又在兩烽之下 各項應役 與他有殊 而亦以溫井 朝聚暮散之類 亂法敗常爲一能事’라고 하였다. 즉 ‘우리 동네는 재[조령]와 물[한강 또는 달천] 사이에 있다. 또한 두 봉수[마골재 봉수와 주정산 봉수] 아래에 있어서 각종 부역에 응함이 남다르다. 또한 온정[온천]이 있어서 아침에 왔다 저녁에 가는 무리들이 법을 어지럽히고 윤리를 흩트리는 것을 능사로 한다.’고 하여 절목을 만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1892년 수안보 상황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즉 마골재 봉수와 주정산 봉수가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봉수는 열흘 단위로 교대 근무를 하는 체제였고, 근무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인근의 마을에 역(役)을 부과하여 충당했다. 인근에 온정동보다 큰 마을인 안부역(安富驛)이 있었지만, 역(驛) 업무에 전담하였기 때문에 온정동에 봉수대에 관련한 역이 부과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10년대에 들어와서 수안보온천에 관한 구체적인 개발 단초들이 보이는 상황이지만, 이미 이 시기에 온천객들의 출입, 즉 외지인이 온천욕을 하기 위해 동네에 드나들었던 상황도 보인다. 외지인의 동네 출입이 빈번해짐에 따라 풍기문란 등의 부차적인 폐해도 있어서 이것이 동네에서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짧은 한 줄이지만, 20세기 수안보온천의 활황 직전 단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문서이며, 그것을 옮긴 비석은 1900년 전후의 수안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수안보초등학교 유지비
올 해로 충주에 개교 100년이 넘는 학교가 3곳이다. 교현초등학교(1896), 엄정초등학교(1908), 대소원초등학교(1919)가 100년 넘은 학교이고, 내년에 노은초등학교(1920), 후년에 용원초등학교(1921), 수안보초등학교(1921)가 각각 개교 100주년을 맞게 된다.
수안보초등학교는 유지비가 세워진 수안보상록호텔 자리가 본래 개교한 수안보공립보통학교 자리였다. 비석에는 일제강점기 이 학교의 개교부터 1982년 6월 23일 58회 졸업식을 끝으로 새 교사로 이전하기까지의 연혁을 기록해 두었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지나칠 부분이지만, 지역에서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한 지역민들의 애절한 이야기와 학교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또한 온천관광지로 대성황을 이루던 시기에 개발 명목하에 이전하게 된 행간의 사연을 읽어낸다면, 수안보온천의 성쇠(盛衰)와 관련하여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 이장 오순영, 면장 김영태 비
불망비나 송덕비는 여느 곳에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두 비석은 이 마을에서 행했던 주인공의 행적을 이해한다면 다른 지역의 비석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먼저 이장 오순영의 비는 무오년(戊午年), 즉 1918년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주인공 오순영의 행적은 앞의 수안보초등학교 유지비의 뒷면 연혁의 윗머리에 기록돼 있다. 그는 1921년 수안보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때 자기 소유의 온천리 299번지 토지 12,157㎡를 기부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상록호텔 부지가 이에 해당되는데, 지역의 교육기관 설립에 앞장선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것을 기리기 위한 비석은 아니지만, 그의 이장으로서 직무수행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비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1874년생이라는 것과, 1918년에는 이장으로 일했다는 것, 그리고 1921년에 수안보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했다는 것이 최소한의 정보이다. 여기에 하나 더할 것은 1928년 청주에서 열린 충청북도 주류품평회와 1931년 수안보에서 열린 제4회 충청북도 주류품평회에 탁주 부문에 출품하여 3등과 2등을 수상한 기록이 보인다. 즉, 1920년대 후반에는 수안보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지역 유지로서 일제강점기 수안보의 인물로서 역할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면장 김영태의 비석은 오순영의 비와 나란히 서있다. 1904년생으로 1933년~1937년까지 상모면장을, 이어 1939년에 괴산면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1952년에 초대 충청북도의원, 1956년에 2대 도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수안보온천과 관련하여 현재 온천수 저장탱크의 시작이 된 원천을 기부한 일이 그의 중요 업적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일면 그가 수안보에서 활동하며 남긴 가장 중요한 일은, 앞의 오순영과 여러 면에서 닮음꼴을 하고 있는 점이다. 즉, 오순영이 일제강점기에 이장을 역임하고 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여 수안보 교육의 기초를 마련했듯이, 김영태는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역임하고, 해방 후에 도의원을 하면서 1954년에 개교한 수안보중학교 부지를 희사해 수안보 중등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것을 들 수 있다.6.25 직후에 세워진 수안보중학교는 1919년 삼일운동 직후에 세워진 수안보초등학교의 설립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부지를 희사하고 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장으로 수안보중학교를 태동시킨 대표 인물이 바로 김영태였다.
두 사람의 비석이 단순히 이장과 면장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수안보라는 지역사회에 기여한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현장에는 이들의 역할에 반해 수안보 지역에서 교육기관의 성립과 변화 과정에서 있었던 사실 설명이 있지 않아 잘 모른다.
◀ 4개 비석의 의미 물탕공원 한켠에 모여 있는 4개 비석은 공원 공간내의 여러 조형물ㆍ시설과 비교해 볼 때에 특별히 주목되는 대상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4개 비석을 하나하나 살펴 지난 100년의 시공간에서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 수안보온천이라는 대외적인 위상 이면의 지역 내에서 갖고 있는 힘의 원천 또는 변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기본적으로 마을자랑비나 유래비와 같은 것들은 공통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한 마을의 변화상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조형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수안보면 소재지인 온천리의 물탕공원에 세워진 4개의 비석은 수안보온천이라고 통칭되는 공간의 변화를 한눈에 읽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유사한 예가 다른 면지역에 있는가 하는 점을 비교해 보면, 4개의 비석이 가지는 의미가 남다름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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