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충주 용산사(龍山寺)와 위치 문제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04]

110. 충주 용산사(龍山寺)와 위치 문제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04]

 

▲ 호암동 택지개발 예정지구에서 출토된 ‘용산사(龍山寺)’ 명문 기와 <자료:충주 호암동 복합유적Ⅴ(ⅦㆍⅧ지구),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ㆍLH, 2018. 3. p.447. 1664번 사진 및 탁본>  

1989년 4월 25일, 충주시 안림동 493번지 소재 충주 대원고등학교 운동장 정지작업 중에 고려시대 청동반자(靑銅飯子)가 하나 수습되었다. 이 반자에는 “忠州牧禪義林寺戊申年盜取因集衆緣鑄成懸排時大定三十年庚戌三月 日 記 揀梁副戶長劉張輔道人冠心法明住持重大師惟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반자로 인해 그동안 무명사지(無名寺址)로 있던 안림동 어림의 절터가 의림사(義林寺)였음이 밝혀졌다.(이성호(李成浩), 「안림동 출토 의림사명 청동반자에 대하여」, 『예성문화』(제11호), 예성동호회, 1990. 참고)이처럼 기록에는 없지만 기와나 반자와 같은 수습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제 이름을 찾는 유적의 예가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충주에는 ‘용산사(龍山寺)’라는 절이 있었다. 문제는 그 절의 위치이다.

 

▶ 용산사(龍山寺)의 존재 증거

2014년 8월 28일 문화재청에서 ‘충주 호암동 택지개발사업부지 내 유적(충북 충주시 호암동ㆍ지현동 일원)’에서 2012년 10월부터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해 온 결과를 발표했다. 고려시대 인장(印章)과 청동거울 등 유물과 △ 구석기 유적 △ 삼국시대 고분 △ 고려~조선시대 분묘 △ 고려시대 토성 △ 조선시대 기왓가마 등이 확인됐다고 밝히며, 충주지역의 대규모 복합유적으로 평가했었다.

 

이 때에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기왓가마 6기 중 한 가마에서 수키와, 암키와, 벽돌 등 551점이 차곡차곡 쟁여진 상태 그대로 노출됐다. 이는 기와를 굽다가 천정이 무너지면서 폐기된 채 유지된 것으로, 가마 내 기와의 재임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로 평가된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 현장설명회에 참석했던 길경택(吉俓澤) 예성문화연구회장은 ‘용산사(龍山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나왔다고 말한다.

 

2018년에 발간된 보고서를 살펴보면, 무너진 기왓가마를 비롯한 6기의 가마 유구를 확인했고, 그 근처의 토성 내부 지점에서 ‘용산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키와 1점이 출토됐다. 기왓가마를 조선 전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에 충주의 가마공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와의 명문 중에는 ‘관(官)’자가 새겨진 것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비록 ‘용산사’라는 명문을 새긴 기와는 한 점이지만 절의 존재를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암키와 하나에 새겨진 이름으로 존재를 증거하는 용산사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일단 ‘용산(龍山)’에 한정해 현재 및 과거의 용산동을 대상 공간으로 가정해보자.

 

▶ 충주면 용산리 사적보존지(史績保存地) 44,619평

 

1927년 1월 16일자 <중외일보(中外日報)>에는 ‘충주면 사적보존지(史績保存地) 문제 원만 낙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해당 지역은 충주면 용산리로, 그 면적은 44,619평이라고 한다. 1923년 이래 충주면의 기본재산 불하인가를 신청하였고 그 수속을 밟던 중이었다. 그런데 1926년 11월에 일 공직자가 사적으로 취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사실이 확인됐다.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됐다는 내용이다.

 

용산리(龍山里)라고 했으니 용산동(龍山洞)으로 공간을 한정할 수 있다. 다만, 용산동은 1964년까지 용산1구와 2구로 나뉘어, 2구는 구 충주의료원과 이마트까지의 문화동 절반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1927년 당시 상황에서 공간을 추정해 보면, 먼저 1916년에 완료된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 결과 성내동 공간을 중심으로 성남동ㆍ성서동 지역은 계획지구로 일본인 중심 거주 및 상업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바깥 공간이 충주 사람들의 주거공간으로, 특히 용산동과 지현동을 중심으로 주거공간이 확장돼 있었다. 용산(龍山)이 있던 주변 역시 황색연초 재배와 관련해 일찌감치 개발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주거 공간 내에 4만 5천여 평에 달하는 사적보존지 설정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용산리였던 용산2구 역시 사직산 북측의 경사면으로 절이 들어설만한 평탄 공간은 없었다.

 

남은 용산리 공간은 지금의 충주공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용산리 동쪽 지역인데, 이 공간이 당시 충주의 사적보존지로 의심된다.

 

▶ 충주사범학교의 개교와 학교 부지

 

충주공업고등학교는 본래 충주사범학교(忠州師範學校) 자리다. 1946년 7월에 문교부에서 부산과 충주에 사범학교 신설을 발표했고, 9월 1일부터 개교한다고 밝혔다. 갑자기 너른 부지의 학교를 신설하고자 할 때에 필요한 부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에 개인 소유 토지를 매입해서 단기간에 학교부지로 조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1927년 기사에 등장하는 용산리 사적보존지 44,619평이 충주사범학교 부지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

 

충주사범학교가 들어선 공간 서쪽(즉, 영진아파트와 경계)은 지금은 복개(覆蓋)된 포장도로이지만, 그 전에는 개천이었다. 또한 동쪽(성남초와 경계)의 절반 역시 개울이었다. 두 물이 흘러 합수되는 안쪽 공간이 바로 충주사범학교 자리였다. 부지 면적도 면적이려니와 평탄 지역이었고, 또한 풍수상 두 물이 만나 매듭지어진 안쪽 공간에 해당되는 곳이다.

 

▶ 충주철불좌상(보물 제98호)과 광부처거리

 

특히 현재 ‘대원사철불’이라고도 불리는 보물 제98호 충주철불좌상은, 일명 ‘광부처(狂佛)’라 불렸다. 그 철불이 있던 곳을 ‘광부처거리’라고 했다. 즉 ‘지금 충주공업고등학교 동북방 노천에 철불좌상(鐵佛坐像)이 있었는데, 이 부처를 건드리면 충주에 미친 사람이 난다고 해서 위해오다가 개구쟁이 목동들이 작대기로 두들겨서 손목이 부러지곤 했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로 이 철불이 있던 원위치가 충주공고 동북방 노천이라고 했다. 어디 다른 먼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 부처가 걸어와 자리한 것이 아닌, 본래 있던 절집 근처에 방기(放棄)된 것이라면, 광불이 있던 곳 근처가 절집이 된다. 그 절집 이름을 용산사(龍山寺)라 가정해 보면, 충주철불좌상은 곧 ‘용산사철불좌상’으로 고쳐야 한다.

 

▶ 충주공업고등학교 운동장의 시ㆍ발굴조사 필요

 

용산사(龍山寺)라 새긴 기와가 존재한다. 고로 충주에는 용산사라는 절이 있었다. 용산사는 ‘용산(龍山)’이 있던 용산동 지역에 있던 절로 한정할 수 있다. 그리고 44,619평의 사적보존지가 용산리에 있었다. 1946년 충주사범학교가 개교할 때 사용된 학교부지는 용산리에 있던 사적보존지가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부처거리’로 불리는 지점이 충주사범학교 자리 동북방 노천으로 부근에 절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따라서 용산사가 용산리 내에 있었던 절이라면, 사적보존지ㆍ충주사범학교ㆍ광부처거리 등을 종합하여 현재의 충주공업고등학교 부지 전체를 용산사(龍山寺) 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곳은 충주사범학교 설치 당시에 중장비를 동원한 대규모 부지조성공사가 진행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유적이 파괴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테니스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의 시굴조사를 통해 용산사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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