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30일, 사직산에서 가진 식목행사에 왕꽃벚나무 500주를 심은 일이 몇 번 뉴스가 됐었다. 멀쩡한 나무 1,200여 그루를 베어내고 관리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과 일제 강점기에 사직단을 신사로 대체했던 아픔의 공간에 일본을 연상시키는 벚나무를 심었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제(2019. 3. 30) 답사길에 본 그 곳은, 아마도 올해는 뿌리 제거를 하지 않은 아까시나무와 씨름할 것 같다.
오늘은 그 공간, 즉 사직산과 사직단, 충주신사를 얘기해 보려 한다.
사직산(社稷山)!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이 있었다. 사단은 토지신(土地神)을 위하던 곳이고, 직단은 오곡(五穀)의 신을 위하던 곳이다. 삶에 있어서 생산의 토대인 땅과 땅에서 키워내는 곡식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며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를 관장하는 신을 위하던 신성공간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그 곳은 의례의 중심 공간이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며 일본인들의 충주 이주정착이 본격화된 1910년대!
그들이 쓴 첫 책인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무라카미 토모지로(村上友次郞), 최근지충주편찬소, 1915)에 ‘사직산충주신사(社稷山忠州神社)’와 ‘사직산정로기념충혼비(社稷山征路紀念忠魂碑)’라는 이름으로 실린 화보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몇 번의 변화 과정을 거쳐 거대한 신사(神社)로 확대됐었고, 해방 직후에 파괴됐다.
충주신사의 조성은 국내의 다른 지역 신사 건축의 시작과 같은 계기가 있었다. 개항도시나 서울 같은 경우에는 이미 1910년 이전에 신사가 들어선 곳이 있었다. 그러나 충주를 비롯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에 신사가 생긴 곳은 1912년 7월 30일의 명치(明治;메이지)천황 사망과 관련을 맺는다. 즉 19세기 후반의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며 제국으로 성장시킨 명치천황의 죽음은 일본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 내는 물론 식민지역의 모든 도시에서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준비했다. 그것이 곧 요배식(遙拜式)이었고, 다시 고쳐 봉도식(奉悼式)이라고 했던 대대적인 장례 추모 행사였다.
요배식 또는 봉도식의 장소로 선택된 곳은 ‘높은 곳, 청결한 곳’으로 통칭되는데, 이때에 충주는 사직산(社稷山)이 그 대상처가 되었다. 명치천황의 재위기간이 45년이다. 그의 죽음을 충주에서 맞은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명치의 자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현신(現神)인 천황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1915년의 사진에 남아있는 초기 충주신사의 모습은 흡사 우리네의 여느 마을의 작은 당집과 같다. 하지만 거기에 쏟은 이주 일본인들의 정성은 지극했고, 1회성 추모행사로 끝내지 않았다.
명치천황의 장례가 끝나고 충주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기원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적 성격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받들어 제사할 것을 의논했다고 한다. 봉도식장이었던 사직산에 신전(神殿)을 만들어 1912년 10월에 준공했고, 곧바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대마(大麻;타아마, 부적)를 받아 11월 7일에 진좌제(鎭座祭)를 행했다. 이후(1913년부터) 학교조합관리자가 씨자총대(氏子總代)가 되어 봄ㆍ가을로 대제(大祭)를 집행하기 시작했다.(이상,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오크도이텡가이(奧土居天外), 1931) 그리고 충주에 이주 정착한 일본인들은 사직산 일대를 ‘충주공원(忠州公園)’이라 부르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 공간으로 삼았다.(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 카나타니마사키(金谷雅城), 금곡상회, 1916)
명치천황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신사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1915년 8월 16일에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 및 포교규칙(布敎規則)’을 반포하고 10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 규칙에도 불구하고 충주신사는 천조대신 외에 명치천황을 추가해 2주(柱)를 제사지냈다.
1929년 2월 26일자 『부산일보(釜山日報)』에는 ‘충주신사(忠州神祠) 승격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 충주신사의 사격(社格)을 ‘신사(神社)’가 아닌 ‘신사(神祠)’라고 했다. 즉, 아직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사당 수준에 머문 것이다. 사격의 승격에 필요한 조건으로 ‘① 신전(神殿)이 소규모이고, 신전의 토지가 개인 명의로 있는 점, ② 사무소(社務所)에 신관(神官)의 사택 건축이 필요함, ③ 제전비(祭典費) 및 신직회(神職會) 출석 등에 필요한 비용의 기본 재산이 필요함’을 개선할 주요 요건으로 들고 있다.(부산일보. 1929. 2. 26. 조간 2면 1단. <충주신사 승격 문제> 참고) 이에 따라 1930년 8월 16일에 충주신사 숭경회(忠州神社崇敬會)를 조직하고 사격 승격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34년에는 신사(神社) 건립 출원을 냈고, 1936년 8월에 읍공진신사(邑供進神社)로 지정되었다.
충주신사는 충주에 이주 장착한 일본인들의 각종 행사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나아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황국신민정책(皇國臣民政策)이 강화되고 신사참배가 일과로 자리하며 공간 침탈을 넘어선 우리의 정신 영역의 근본적인 침탈 개조의 상징으로 변했다. 이 즈음인 1937년 5월에 충주신사를 군사(郡社)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또한 1939년 4월에는 충주신사, 즉 충주공원(사직산) 앞에 부지를 마련하여 충주공설운동장을 신설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 충주공설운동장 부지는 당시 충주 이주 정착 일본인 유력자의 하나였던 시오타 테이스케(鹽田禎介)의 15,000원 기부에 의한 것으로, 그 대상 부지는 현 남한강초등학교가 된다.
전쟁에 광분하던 1940년에는 전국적으로 면단위까지의 신사(神祠) 설치 정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충청북도에서도 ‘1군(郡)에 1신사(神社), 1면(面)에 1신사(神祠) 조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43년까지 충청북도 내에 군단위 신사(神社) 및 면지역의 신사(神祠)를 만들 계획을 추진하였다.(매일신보. 1940. 1. 19. 4면 2단 참조)이 계획의 완성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으며 행한 여러 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사(神社) 또는 신사(神祠)의 파괴였다고 한다. 식민통치의 설움과 아픔을 일제의 최고 상징물 파괴로 토해낸 것이다. 충주신사 역시 그 시기에 파괴된 것으로 이야기되며, 대신 거기에 망원대(望遠臺)를 세웠었다고 한다. 파괴와 동시에 그것은 사라졌지만, 그 후의 동일 공간, 즉 사직산(社稷山)을 중심으로 진행된 일을 보면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사직산은 충주 상수도 급수장, 즉 고도차를 이용한 배수지로 자리해 수돗물 공급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충주의 상수도 설치 과정을 보면, 1955년 5월 27일에 내무부 건설국에서 측량반이 충주에 와서 측량을 실시했다. 측량 결과에 따른 설계에 의하면 ‘단월리에 양수장(揚水場)(현, 단월의 충주시상수도사업소)을 설치하고, 3,450미터 떨어진 사직산(社稷山)에 정수장(淨水場)을 설치하고, 연장 4,630미터의 배수본관(背水本管)으로부터 5,370미터의 지관(支管)을 통하여 시내 전체에 급수될 것이라고 하며, 착공시일은 자세히 모르나 착공만 시작되면 12개월이면 완전한 준공을 볼 수 있다.’(충북신보. 1955. 6. 7. 2면 11단 참조)고 하여 상수도 시설에 대한 첫 그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1956년 5월에 1차 공사비 600만환 보조가 확정됐고, 7월 8일 충주시 승격과 중원군 분리라는 행정구역 개편이 있은 뒤에, 충주시의 현안 사업으로 변경되어 7월 13일에 충주시청 회의실에서 1차 공사(단월 수원지와 양수장 공사) 입찰을 통해 서울 용산구에 본점을 둔 초석건설사(礎石建設社, 대표 朴海遠)에 낙찰됐다. 7월 16일에 착공해 9월 30일에 완공 예정이라던 공사는 8월 24일이 되어서도 착공하지 않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상수도 공사는 제2차(1956), 제3차(1957)로 나뉘어 진행됐고, 2차 공사에서 사직산 배수지 공사가 시작되었다. 여러 차례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며 진행된 상수도 공사는 1959년 여름에야 수돗물 공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7년에 사직산은 수돗물 공급을 위한 배수지로 헤쳐졌다. 사직산의 원형 자체가 훼손된 것이다. 63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상황과 기술력, 그리고 문화적 인식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전후(戰後) 복구과정의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사직산을 하나의 공간 문제로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공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비용과 장소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겠지만, 지난 100년간 치유되지 않은 일제 강점의 아픈 역사가 아직도 우리 주변 곳곳에 우리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파괴해버린 형국이 된 사직산과 사직단은, 다시 우리의 손으로 되살려 내야 할 공간이다. 이에 대한 행정적 선행 조치와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제 막 숨통 틔우려는 연당(蓮塘, 구 성내동 충주교육청 부지)을 덮어두려는 충주읍성 광장 및 주차장 조성사업은 문화적, 역사적 누(累)를 범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수 있다. 우리 손으로 용산(龍山)을 파냈고, 사직산(社稷山)을 수장(水葬)시킨 것과 같은 지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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