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와 충렬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눠 정리해봤다. 요즘 코로나 사태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전시실 자료를 몇 년 전에 찍어둔 사진으로 확인하다가 든 생각이 있어서 한번 더 보충하고자 한다.
지금의 충렬사는 1970년대 후반에 건물의 재배치와 보수, 신축 등이 정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서원으로서의 상징인 강당을 옮겼다. 그래서 충렬사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서의 기본 공간 구조가 완전히 변형되었다. 충렬사의 사당 공간만 부각되어 일반인은 충렬사가 단지 임경업 장군을 추념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 <충렬사 편액> 위는 1727년(영조 3) 사액 당시에 내려진 것이고, 아래는 1970년대 후반에 정화사업 과정에서 교체된 편액이다. 본래의 의미와 함께 특히 사액(賜額) 사실을 알려주는 위의 편액이 걸려야 마땅하다.
|
<충렬사 편액>
충렬사가 사액서원이었음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바로 충렬사 편액이다. 지금은 충렬사 전시실에 옮겨져 전시하고 있다. 그 편액 끝에는
崇禎紀元後丁未 / 賜額
이라고 하여, 충렬사 당호와 함께 그 시기와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해당 연도는 1727년이다. 영조 3년으로 모든 기록에서 보이는 충렬사의 사액과 관련한 가장 기본적이며 명확한 증거이다.
‘사액(賜額)’은 ‘조선시대에 왕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던 일’이다. 영조가 충렬사라는 사당의 이름을 지어, 그 이름을 써서 새긴 편액을 내린 일이 충렬사 편액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충렬사를 사액할 당시에 영조는 서원에 대한 사액을 극히 꺼려했다. 붕당정치의 폐단을 알고 있었고, 그 온상 또는 상징화하려는 세력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의 대표적인 정책 중의 하나가 탕평책(蕩平策)이라는 역설로 자리한다. 집권초기의 분위기에서 임경업에 대한 사액 건은 파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현재 전시실에 옮겨진 편액은 복제품을 만들더라도 충렬사의 제 위치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정화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친필이라고 얘기된다. 그 당시에는 의미를 두었을지 모르지만, 충렬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위상에 있어서는 원래의 편액이 원래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맞다. 다만, 지금 걸린 편액은 떼어서 전시실로 옮기고, 그 전후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이것 또한 좋은 역사 기록이고 자료가 될 것이다.
<충렬사강당 편액>
마찬가지로 충렬사강당의 편액도 전시실에 옮겨져 있다.
전시실로 옮겨놓은 편액에는 쓴 시기를 적어놓고 있다. ‘崇禎紀元後三壬寅壬子季秋’라고 하여 1782년(정조 6) 가을에 조각한 것이다. 정조의 등극 초기부터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던 충렬사. 그 과정에서 완전한 서원의 형태로 강당과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갖추어진 최절정기의 사실을 담고 있는 편액이다.
충렬사강당은 정화사업 과정에서 해체, 이전, 복원 과정을 거쳤다. 사당인 충렬사가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건축했다면, 충렬사강당은 240여 년 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충렬사 편액과 마찬가지로 전시실로 옮기고 원래의 편액을 복제하여 거는 것이 충렬사강당의 역사성에 맞다고 본다.
특히 충렬사강당의 경우에 특이하게 한 쌍의 흰코끼리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임경업 장군의 기상(氣相)을 표현한 것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현장을 찾는 이들에게 낯선 뭔가를 강당 마루 천정 벽에 걸려있는 중수기 등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여기에만 있는 특징을 충분히 피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 <충렬사의 낮은 담장 유(壝)> 1921년에 촬영된 충렬사 전경의 부분이다. 충렬사 사당 뒤에 보이는 것이 유(壝)이다. 여기에서 적용된 예가 장릉 배식단에 응용되었다. 원형콘텐츠가 충렬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 <영월 장릉의 배식단> 두 면을 두른 낮은 담장은 유(壝)라고 한다. 이러한 형식은 충렬사의 담장에서 본뜬 것이라고 정조가 밝힌 바 있다.
|
<낮은 담장 유(壝)>
충렬사 둘레에 친 낮은 담장을 유(壝)라고 한다. 이 담장의 구체적인 설명은 1791년(정조 15)에 영월 장릉에 추가된 배식단(配食壇)의 설치에서 보인다. 단종의 유폐와 죽음에 슬퍼한 268명에 대해 배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조가 언급한다.
“義取鶴寺之祭, 制倣㺚川之壝” 뜻은 동학사의 제사에서 취한 것이고, 제도는 달천의 유를 본뜬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실제의 예가 있으니, 다른 말 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란 얘기였다. 곧 낮은 담장의 전형적인 본이 된 충렬사의 유(壝)는 새로운 담장 양식의 시작이며, 왕에 의해 공식화된 원형 콘텐츠가 된다.
지금의 담장이 옛모습을 얼마나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 키를 넘겨 까치발 뛰어야만 볼 수 있는 높이는 아니다. 따라서 담장 형식에 대해 일반 방문객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동시에 영월 장릉 배식단의 사례까지 함께 알려준다면, 충렬사를 찾는 이들의 각자 상상에서 충주에서 알아가는 뭔가가 더 많아질 것이다.
<왜 홍살문이 없을까?>
중고등학교 시절 충렬사를 몇 번 갔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홍살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액된 서원으로 홍살문은 있었던 것이 맞다. 다만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졌으며 어떤 형태였는가는 알 수 없다.
충렬사는 입구 찾기부터가 복잡하다. 아니, 위험하다. 넓혀진 외곽도로 때문에 초행길인 사람은 신호받기부터 쉽지 않다. 또한 입구도 2중으로 나뉘어 있어서 잠시 헛갈리게 하기도 한다. 그 입구의 표식이며 위상으로 홍살문 하나를 제대로 복원해 놓는다면 들어서는 처음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까?
정화사업이라는 것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했고, 고증과 원형이라는 부분이 무시되었던 측면도 있다. 그래서 사라진 본래의 공간 의미와 사소하더라고 충렬사가 갖고 있던 뜻이 왜곡된 면도 많다. 당장 본래의 공간 구조로 바꾸기에는 비용부터가 만만찮을 것이다.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되 당장 할 수 있는 편액의 제자리잡기 같은 것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갖춰놓고 제대로 알려줄 때에 애초의 목적과 이유가 더욱 명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