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집

김영희 | 기사입력 2021/03/16 [13:31]

옛 집

김영희 | 입력 : 2021/03/16 [13:31]

▲ 김영희 시인     ©

파릇파릇한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돋아나는 봄은 건강하다.

 

시골길 걷다 보면 사과꽃도 피어나고 보리도 한 뼘 이상 자라있다. 냉이는 벌써 하얗게 꽃이 핀다. 줄기에서 겨울을 난 하수오 씨앗은 2월부터 봄 냄새 맡고 날아가더니 껍데기만 입을 벌리고 있다. 도깨비 가시도 바람을 타고 날아와 옷에 붙는다. 갈대는 씨앗이 다 날아가자 가까스로 지탱하던 온 몸이 허물어진다. 씨앗엔 우주를 담은 날개가 있다. 우주를 담은 생명이 있다. 꿈이 있는 씨앗은 강하다. 자연으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씨앗은 더욱 강하다.

 

지난 해에는 비어있는 옛집 마당에 저절로 호박이 났다. 호박은 사방으로 뻗어 먹음직한 호박이 덩굴 마디마다 열렸다. 한번에 서너 개씩 따면 나누어 먹기도 했다. 호박이 주인이 자주 보고 싶어, 많이 달리는 것 같았다. 나이든 호박은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 겨울까지 먹었다. 집 변두리에는 돌나물도 다육처럼 빼곡히 자란다. 저절로 자란 뽕나무는 오디가 새카맣게 열려도 손이 안 닿아 새들의 밥이 된다.

 

살던 옛집은 서쪽부터 서서히 기울어 동쪽기둥만 겨우 남았다. 몇 년을 혼자 버티다 중심을잃더니 겉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함께 오래가는 것일까. 주인 잃은 집은 더없이 외로워 보인다. 지난 달에는 덩굴풀이 곱게 수 놓은 문살을 부수고 들어가 사십여 권의 책만 간신히 가지고 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당엔 풀이 자유롭다. 풀뿐 아니라 작은 나무도 나서 자란다. 올 봄에는 나무를 몇 그루 심고 싶지만 소독 안하고 잘 자랄 수 있는 나무가 있을까 싶다. 시골집 입구에서 달의 의자가 돼 주던 호두나무는 한 동안 죽은 듯 하더니 다시 살아난다. 달이 호두나무에 걸터앉아 소리 없는 이야기 들어주던 나무다. 아이들이 크면서 등교문제로 시내에 나와 살다 보니 호두나무는 시름시름 생기를 잃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사목이 돼가던 호두나무에 새로운 가지가 자라고 있다. 지난 십이월에는 때아닌 명자꽃도 몇 송이 피었다. 옛집은 마을에서 제일 꼭대기 집이라 조용하다. 마당 남쪽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은거하던 배극렴을 찾아 삼고초려 했다는 어래산이 바라보인다. 서북쪽은 산이 둘러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기도 한다. 아담한 터는 서른 초에 직장 다니며 모은 돈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다. 옛집에 가면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은 가장 힘든 시기에 글로 달래며 달하고 친구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집은 무너져 옛일들을 지우개처럼 지워도, 나무는 꽃피우며 추억을 이어준다. 오래 전에는 어린호두나무가 자라던 밭이지만 지금은 반 이상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시멘트로 덮여 있어도 틈만 있으면 풀이란 풀은 다 비집고 올라온다. 그 중 억센 풀은 잘 뽑히지도 않는다. 풀을 뽑고 얼마 있으면 또 올라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하늘만 믿고 자라는 자연은 그토록 강한 것일까. 한 번씩 다니러 가면 서 있다가 온다. 앉을 의자 하나도 없어서이다.

 

그래도 3월 마당에는 봄이 앙증맞게 웃는다. 풀마저도 예쁘다. 뒷산에는 진달래꽃망울이 수줍은 듯 내민다. 도랑에서는 개구리 입 떼는 소리 여리게 들린다. 자연은 귀와 눈이 없어도 나보다 더 때를 잘 안다. 사계절을 품고 사는 옛집은 해거리가 필요 없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올해는 마당 가에 고운 나무를 심어 향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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