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에서 안반내 지나 가흥까지 - 2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9/30 [10:03]

갈마에서 안반내 지나 가흥까지 - 2

김희찬 | 입력 : 2024/09/30 [10:03]

▲ 앞에서 본 창동마애불  © 충주신문

 

▲ 옆에서 본 창동마애불  © 충주신문

 

▲ 창동마애불에서 본 탄금대  © 충주신문

 

▲ 창동마애불에서 본 계족산  © 충주신문

 

▲ 창동마애불의 시선 따라 펼쳐진 풍광  © 충주신문

 

▲ <정씨묘원>에서 본 창동 마을과 강 건너 풍경  © 충주신문

 

작년에 산사태가 났던 곳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눈에 든다. 창동(倉洞)이다. 첫머리에서 강쪽으로 봉긋 솟은 동산을 보통 청금정(聽琴亭)이라고 부른다.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던 곳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거기에 오르면 꼭대기에 콘크리트로 만든 정자가 하나 있다.

 

청금정을 시작으로 하담의 사휴정(四休亭) 또는 목계의 창랑정(滄浪亭)까지 강가의 경치 좋은 곳에 너댓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두고 옛날에 우륵 선인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며 쉬던 곳이라는 낭만적인 의미로 두기도 한다. 그 옛날 일을 어찌 알랴만은 조선시대에 물길을 이용하며 강가에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어 살던 때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그곳을 찾았던 이들이 남긴 글을 모으면 좋은 글감이 만들어진다.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공간이 탄금대부터 목계까지 이어흐르는 남한강 줄기인데, 충주에서는 그것을 소재로 정리한 글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은 강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청금정으로 부르는 작은 동산에는 ‘창동리마애불’이 있다. 강가의 바위에 조각됐는데, 심지어 신립 장군을 새긴 것이라는 전설까지 포개져 있어서 1592년의 충주 탄금대 전투가 남긴 충주의 아픔과 슬픔을 짐작하게 한다.

 

마애불에 가는 길은 깎아지른 계단이다. 그 기울기에 휘청할 정도인데, 왜 이리 가파른 계단길을 만들었을까?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은 길이다. 왜냐하면, 이 마애불은 길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새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가야만 마애불을 만날 수 있듯, 합수머리를 지나며 갑자기 빨라진 쇠꼬지여울의 빠른 물살을 빠져나와 한숨 돌리며 강길에서 바라보는 눈앞에 새긴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강 물길을 이용하던 사공과 뗏꾼들이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던 대상 중의 하나가 창동마애불이었다. 그래서 창동마애불을 제대로 보려면 강심(江心)에서 보아야 하는데, 탄금호가 생긴 후에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갈마에서 시작해 걸어가는 길과 나란히 흐르는 강에는 배나 떼를 몰던 이들이 안전을 기원하던 대상이 강가에 이어져 있었다.

 

창동마애불은 그 속에 쇠를 품고 있다. 마애불을 옆에서 보면 안쪽으로 5°쯤 기울여 깎고 새겼는데, 목 아래 부분은 김칫국물을 쏟아부은 듯 붉게 물들어 있다. 바위가 품은 철분이 오랜 세월이 지나며 새나와 밴 녹물의 흔적이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발 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가로 세로로 갈라진 마애불을 새긴 바위는 곧 허물어질 것 같기도 하다.

 

마애불의 시선을 따라 강을 보고, 탄금대를 보고, 멀리 계족산을 본다. 합수머리 두 물줄기가 합치는 뒤에 자리한 탄금대는, 어쩌면 물길에 놓인 충주의 대문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탄금대는 견문산(犬門山)이라는 이름과 대문산(大門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보조댐이 만들어지기 전의 기억이 별로 없는 나는 지금 보이는 것에서 상상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풍광이다. 몇 장 사진을 담고 마애불 구경을 마치고 돌아 나온다.

 

<청금정도에 쓰다〔題聽琴亭圖〕>

 

노인은 세상일에 종사하기 견디지 못해 / 衰人不堪供世事

초가집 한 채 동회 골짜기에 지었네 / 誅茅一把東淮谷

거문고와 책은 뒤집혀 좌우에 버려졌고 / 琴書顚倒拋左右

북창에 시원한 바람 부니 홀로 조용히 누웠네 / 北窓淸風臥幽獨

어디선가 온 박생이라는 미소년이 / 何來朴生美少年

소매에서 용면의 그림 한 폭 가져왔네 / 袖中龍眠畫一幅

이것이 누암에 있는 청금정이라 하는데 / 言是樓巖聽琴亭

정자는 월탄의 첫 번째 구비를 마주했네 / 亭臨月灘第一曲

상류의 형승은 대략 알고 있으니 / 上游形勝領略盡

신라의 유적도 이목에 남아 있네 / 羅代遺蹤在耳目

손으로 우선의 백 자 누대 가리키니 / 指點于仙百尺臺

산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 있네 / 金生廢菴山之足

무엇보다 옛날 탄수가 살던 전원이니 / 最是灘叟舊田園

회옹의 강가 집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 何如淮翁江上屋

백 이랑 논은 푸른 빛 드물지 않고 / 百頃䆉稏靑不稀

천 줄기 버들은 묶은 것처럼 빽빽하네 / 千柄芙蓉森如束

묻노니, 그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 問汝此中何所事

위로는 늙은 형 섬기고 아울러 친족 거두네 / 上事老兄兼收族

처자는 손수 물 긷고 절구 찧으니 / 妻兒手自操井臼

가난한 선비의 생애는 벼슬을 바라지 않네 / 貧士生涯不干祿

손님 맞아 낚시 드리우면 고기 제법 팔팔하고 / 迎賓垂釣頗潑刺

닭 잡고 기장밥 지어 나물 섞으리라 / 殺鷄爲黍雜野蔌

회옹이 기뻐하며 약속하는 말 있으니 / 淮叟欣然有成言

가을이 오면 도담, 구담, 옥순봉 찾아 / 秋來欲訪島龜玉

일엽편주 타고 차례로 청금정에 오르면 / 扁舟歷登聽琴亭

그림 속의 산천이 응당 빽빽하리라 / 畫中山川應簇簇

이에 술잔 들고 위쪽에 시를 쓰니 / 於是把酒題上頭

지는 노을과 외로운 따오기 저버릴 수 있으랴 / 肯負落霞與孤鶩

    - 신익성, 「題聽琴亭圖」, 『樂全堂集』 제1권, 시, 칠언고체 / 한국고전종합DB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지은 시이다. ‘청금정도(聽琴亭圖)’로 제목을 단 그림을 감상하고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국에 몇 개의 청금정이 있지만, 시에 표현된 여러 지명을 보면 탄금대와 그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이 있다면 그것을 보며 실감할 수 있겠지만, 그림이 없으니 시에 표현된 묘사를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다.

 

월탄의 첫 구비를 마주해 정자를 그렸으니 탄금대를 지나며 휘감아도는 첫 구비인 쇠꼬지여울일 것이다. 신라의 유적은 중앙탑을 가리킨 것일 테고, 우선의 백 자 누대가 곧 탄금대이다. 산 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는 김생사(金生寺)를 말한 것이고, 탄수(灘叟)가 살던 전원은 김생사와 탄금대 사이에 있었던 용탄(龍灘)을 말한다. 백 이랑의 논은 강 건너 금가면에 빼곡히 들어앉은 것의 표현일 것이고, 천 줄기 버들은 강가에 심겼던 그것을 말한 것이다. 회옹(淮翁)으로 표현하며 그림으로 뛰어든 작자는 상상의 나래를 가을 풍경으로 옮겨 도담, 구담, 옥순봉에 뻗치며 일엽편주로 거슬러 오르내리던 뱃길로 연결하며 세상을 꽉 채우고 있다. 이 또한 상상해야 그릴 수 있는 풍광이다. 그만큼 이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을 계속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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