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제(大堤)와 함지(含池), 쇠저울과 금제(金堤)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2/04/28 [11:14]

2. 대제(大堤)와 함지(含池), 쇠저울과 금제(金堤)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2/04/28 [11:14]

 함지’라 불리는 그곳의 행정명칭은 ‘대제저수지(大堤貯水池)’이다. ‘함지(陷地)’로 착각하여 ‘부상(扶桑)’을 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곳 함지는 지역의 지명에서 찾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함지는 본래 ‘함주연(含珠淵)’이라 불리었다. ‘구슬을 머금은 못’ 정도로 풀 수 있는데, 이것과 짝을 이루는 지명이 바로 ‘관주(貫珠)’이다. 미덕학원, 대림산 밑에 위치한 관주골이 그곳이다. 관주, ‘구슬을 꿰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꿰다가 떨어진 구슬이 냇물을 따라 흘러 함주연에 모인 것으로 이해하면, 이 얼마나 운치있고 예쁜 이름인가?

 

▲ 함지의 무넘이 보,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는 본래의 자연암벽을 다듬어 만들었을 함주연(含珠淵)의 원모습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함지에 대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신문기사가 1927년에 보인다. ‘대제 남단의 암벽굴착공사로 인한 일류수(溢流水) 응용의 형적 같은 것은 현대 사람으로 경탄할만 하였다 한다’가 그것이다. 이는 함주연이 자연암벽이 오랜 침식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고, 다시 이것의 윗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일정한 수위가 되면 물이 흘러넘치도록 만든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다듬으면서 옆으로 뚝방을 쌓아 물을 가둠으로써 ‘대제(大堤)’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최근에 잇따라 발굴된 유적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호암택지지구 조성 과정에서 2014년에 발굴된 구석기~조선시대에 이르는 복합유적군과 지난해에 종합스포츠타운 건설과정에서 발굴되었던 초기철기 시대의 왕급(王級) 무덤의 경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인간의 정주(定住) 여건에 있어 농사가 행해지고, 그것을 위한 수리시설이 마련되었다면 1차적으로 함주연과 같은 자연 연못의 존재가 유리했을 것이다. 농사 규모의 확대에 따라 인공 저수지로의 확장 과정을 거쳐 그만큼의 세를 형성하는 집단의 존재가 가능했을 것으로 이해하면,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의 함지는 수문개폐에 의한 방식이 아닌 고인 물이 넘쳐흐르는 방식으로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증개축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제(함지), 소제(호암지), 금제(金堤)>의 세 저수지는 조선시대 지리서에 충주를 대표하는 수리시설로 등장한다. 대제와 소제는 제방의 크기, 즉 담수량의 차이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이해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크기로만 이해한다면 호암지가 대제요, 함지가 소제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 1922년 이후 호암제로의 명칭변경을 통한 대대적인 증축공사 결과임을 안다면 대제와 소제의 혼선은 없을 것이다.

 

▲ 금제(쇠저울) 둑을 기준으로 왼쪽이 연못이고 오른쪽이 뚝방 밑까지 진행되고 있는 도로공사 현장이다. 이후의 진척이 어떻게 전개될지 관심가는 대목이다. 


함지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 금제이다. 시청 서편에 조금 남아있는 논자락 위쪽에 있는 금제는 ‘쇠저울’로 불린다. 한자화 과정에서 쇠저울이 금제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금제지구 개발을 통해 발굴되었던 여러 유적의 분포를 보면 함지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다만 여기에는 쇠(金)가 이름에 자리하고 있어 철의 도시 충주의 선사시대부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금제가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망 구성에 있어서 시청 뒤쪽과 앞쪽의 대로를 잇는 남북간 연결 4차로 도로 공사가 금제 뚝방 밑까지 바짝 치고 올라와 있다. 다음 수순은 금제를 메우고 직선도로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평면적인 직선도로를 구상하는 도시계획이 초기에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당초 팽고리산을 절개해 외곽도로와 연계시키려했던 계획은 보류되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고대 도시 충주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금제(金堤)를 용도 폐기하여 없앤다는 것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금릉동(金陵洞)의 금자가 이 금제에서 시작된다. 용산(龍山)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지 않고 용산동에서 용산을 없앤 것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님을 거울삼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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