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선 안될’ 삼일 운동과 ‘도발 또 도발’ 왜곡된 일본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17/02/22 [21:04]

‘잊어선 안될’ 삼일 운동과 ‘도발 또 도발’ 왜곡된 일본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17/02/22 [21:04]
삼일 만세운동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일본의 간악한 침탈에 맞서 굳건한 정신으로 대항했던 우리의 기상이다.

구한말 의병으로 강력히 대항했던 충주의 정신은 일본 헌병의 철통같은 탄압 속에서도 달천리 만세운동(1919. 3. 10.), 충주장날 만세운동(3.11.), 신니 용원장터 만세운동(4.1.)을 함으로서 역사적으로 국가의 위기 때마다 이 나라를 지켜온 충절의 고장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측면의 삼일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충주 만세운동 그리고 끊임없이 도발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주장에 우리가 대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짚어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 을미의병과 충주성 끊임없는 투쟁

제천과 충주 경계지역인 공전리에서 일어나 영월에서 창의한 을미의병은 의병장 유인석 선생을 필두로 제천과 단양을 간단히 제압하고 충주성 공략에 나선다.

한양으로 진군하려면 중간 교두보인 충주성의 점령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뺏고 빼앗기는 과정 속에서 충주성 전투는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충주성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일본 역시 많은 군대를 파병하여 충주성 탈환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치열했던 충주성 전투로 인해 관찰사가 주둔하던 충주는 도청소재지 마저 청주로 빼앗기는 불운을 겪게 된다.

또한 강력한 일본 헌병의 감시로 많은 제약을 받았을뿐 아니라 당시 전국에서 몇 안 되는 헌병 2개 중대 파견지로 감시망은 더욱 강화되었다.

 
◇ 민족 자결주의와 삼일 만세운동

협상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동맹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내놓은 14개 조항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주의 즉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민족자결주의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식민지가 많고 또한 패전국들 입장에서 보면 헝가리나 터키 등 발칸반도의 넓은 영토를 분리해야 힘이 약화되기 때문에 약소민족들에 대한 독립을 시킴으로서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약소민족으로 강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 입장에서 보면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지식인 계층에서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로 독립이 되기란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민족적 저항으로 일본에게 강력한 힘이 조선 민중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력을 과시해야 일본도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컸던 것이다.

또한 을미의병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정신이 독립에 대한 정신으로 승화하고 우리민족 가슴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삼일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하고 15,850명이 부상당했으며 45,306명이 체포되었다는 민족의 저력을 남기게 된 것이다. 만세운동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기화로 한양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또 다른 지방으로 번져 나갔고 지역마다 혈서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가가호호 뿌려져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 충주의 삼일 만세운동과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

1919년 3월 충청북도장관(도지사) 장헌식은 3월 14일과 15일에 충주보통학교(교현초등학교) 강당에서 일반생도와 각 면장, 구장 그리고 충주 유지들을 모아놓고 협박성 연설을 한다.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패전국은 국가의 통일을 상실하고 사분오열의 화를 입었는데 이들 제국 국민은 선후책을 강구중이다.

선후책에는 의론이 분분한데 그 중 미국이 제창한 것이 있는데 패전국 국민은 각 민족 종별에 의거해 통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민족 자결이라 한다.

이는 유럽제국과 미국은 여러 종족이 섞여진 나라로서 패전국은 각종의 민족이 각각의 목적에 의거해 장래 생존을 도모 할 것을 결정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전후 사분오열 상태에 처한 패전국을 처리하는 계책으로 유효하나 전승국 중에서는 이러한 의론에 부응해 민족 자결을 창도할 나라가 없음이 명백하다. 전승국에서 민족 자결의론을 실행한다면 국가의 안위를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민족자결의 의론을 강화회의에서 승인할지라도 그 실행범위는 패전 제국의 민족에만 국한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러한 본의를 살피지 못하고 경거망동 한다면 크게는 그 화가 전 세계에 미칠 것이고 작게는 개인과 가정에 불행을 가져올 것임을 가슴에 새겨야한다.

현재 조선의 각 지방에서 민족 자결의 참뜻을 오해하며 혹은 고의로 곡해하여 뭇사람들을 홀려 소요를 일으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제 멋대로 날 뛰는 무리들이 많은데 이는 한일 합방이래로 국법에서 금하는 것이며 엄중 처분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충청북도에는 그러한 무리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다. 이에 장래를 살펴 깨우쳐 돌아보고 생업에 전력하라 또한 뜬소문 믿지 말고 본장관의 말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반협박성 내용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지사의 성명에도 아랑 곳 없이 1919년 3월 10일 이미 달천리에서 천도교들이 만세운동을 하여 홍종호, 김흥배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11일(음 2.10.)에는 충주 읍내에서 수천 명이 집결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는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이라던 괴산 만세운동보다. 1주일 앞선 것이다.

또한 4월 1일(음 3.1.)에는 신니면 용원리 장터 만세운동을 펼쳤다. 3월 10일에는 충주간이 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에서 교사인 유흥식(후 유자명)이 학생 오언영, 장천식, 유석보, 정모 등과 3월 16일(음 2. 15.) 충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결의하였으나 정모의 밀고로 실패했다.

4월 8일은 중국 상해에서 귀국한 김종부 서울 신학교 학생 장량헌, 오언영, 감리교인 최명희가 칠금리에 있는 권태은의 집에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오언영의 여동생을 시켜 보통학교 여교사 김연순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사전발각으로 실패하였다. 이들은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 당하였으나 압송도중에도 내내 만세를 부르고 의기양양하였다고 한다.

 
◇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 결성과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

충주 앙성면 출신 이병철은 1919년 5월초 상해에서 귀국한 조용주, 연병호 등과 뜻을 모아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을 결성하고 총무 일을 맡는다.

이는 파리 강화조약에 신한 청년단 측의 대표로 파견될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이다. 충주사람들이 3분의 1이나 되는 단체로서 유자명, 정낙윤 등도 이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을 결성하기 이전 이병철은 1919년 4월 자신의 연인 경하순을 비롯하여 김원경, 최숙자 등 기독교 계통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지도하여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대조선 독립 애국 부인회 고문직을 맡는다.

이 단체는 회원들이 자수 등을 놓아 마련한 자금을 투옥된 독립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구조와 옥바라지에 사용 되었다.

또한 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를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과 연결시켜 조직 확충에도 힘을 쏟게 된다.

6월 들어 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와 혈성단 애국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임시 정부에 대한 자금지원 활동에도 큰 활약을 하여 애국금수합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또한 대한적십자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총지부 간사를 맡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이종익 쪽에서 움직였던 정태영은 3월 1일 종로 현장에 있었고 3월 2일 다시 모인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보신각의 종을 친 사람이다. 그리고 정태영은 이병철과 합류하여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의 일원이 된다. 대한민국 초기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이끌던 몽양 여운형도 처가가 노은면이다.

이러한 충주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결속을 다지게 한 것이 가금면에 있던 누암서원이다. 누암서원중심으로 맺어진 학맥이 혼인관계를 통해 결속이 더욱 다져졌던 것이다.

이병철과 윤우영(충주 지부장) 누암서원 중심인 정경원 家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정경원은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조선 최초로 참가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과 그들의 2세들이 충주는 물론 서울과 상해 등지에서 충주사람으로 활동하며 일제와 맞서 맹렬히 싸웠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의병장 박남규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탄생한 곳이 충주이다.
 

◇ 삼일 만세운동을 통해 본 자주적 의식과 국가관

일제의 압박 속에서 고난의 36년을 보낸 우리 민족은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일본의 만행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것은 끝까지 진실을 거부하는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 주장이다.

일본은 지난 부산 일본 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건립문제 발끈하여 일본영사를 귀국시키고 아직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위배된다는 것인데 우리정부에서는 소녀상 철거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권고사항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인데 소녀상을 세우는 것이 마치 불법인양 말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할 줄 모르고 사과할 줄 모르면서 돈 몇 푼에 합의했다고 역사의 실체가 없어지는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은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는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속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이웃 국가 간의 화합이 이루어지고 교류의 꽃이 피는 것이다.

또한 독도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 일본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지속적으로 우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이웃 간 관계개선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는 그 어떠한 행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서로 대립하여 다투는 모습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다.

우리가 단합하고 국론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루어야 치욕의 역사는 되풀이 하지 않은 길임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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