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형 충주시장이 충주시민의 날을 충주의 날로 바꾸어 실행하는 안을 제시했다. 지금껏 실행해오던 충주시민의 날은 1956년 7월 8일 충주시가 시로 승격되던 날을 기념하여 해마다 7월 8일에 행사를 치러 올해로 68년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넓은 안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충주시로의 승격은 시가 된 것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충주라는 지명이 역사 속에서 탄생한 것은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년) 태조 왕건이 전국의 군현을 개편할 때 중원부를 태조 왕건의 한 팔이 되어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충성을 다하고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의미로 충주라는 지명을 특별히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충주는 1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더욱이 충주는 역사 속에서 국가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부분이 많아 충성심이 강하고 호국정신이 투철했던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몽항쟁 시 충주산성 전투와 다인철소 전투를 비롯한 9번 침입에 8번 승리한 전과가 이를 말해주고 있고 금나라의 침입으로 연패 행진을 이어가던 고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서 충주와 제천사이에 있는 박달현 싸움의 김취려, 최운해 장군의 전투가 그렇다. 또한 비록 패하긴 했지만 임진왜란 시 신립의 전투 역시 팔천의 군사가 목숨 바쳐 충성한 곳이기도 하고, 6·25 한국전쟁 시 동락리에서 벌어진 6사단 7연대 2대대가 적 15사단 48연대 병력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소련제 무기획득으로 소련 개입 사실을 밝힘으로서 유엔 참전을 가능케 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 것 또한 충주의 호국 정신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더욱이 이 전투의 승리의 주역인 6사단이 충주에서 창설 된 사단이었고, 충주 주변 병력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한 점에서 충주의 정신력은 대단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 뿐 아니라 지리적 측면, 전략적 측면에서도 충주는 삼국시대 각 국이 탐냈던 도시였고 철기시대였던 당시 양질의 철을 생산했던 충주는 각 국이 가장 탐 낸 도시이기도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므로 조선 통신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충주를 통해 한양을 갔기에 충주는 항상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더욱이 세곡을 쌓아놓는 창고가 가흥리 주변에 설치됨으로써 목계나루와 서울 마포나루로의 연결 세곡창고의 물류 거래 등으로 보부상이 많이 들어와 조선후기까지 인구가 전국에서 3~4위를 기록하는 등 크게 번성하는 도시였다는 점에서 이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고 제2의 충주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충주를 기억할 수 있는 날로 변경하는 것은 타당할 것으로 본다.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충주는 현재 많이 낙후되어있다.
우량 기업들은 그런대로 자리를 잡고 있고 수소의 메카로서 미래 에너지 산업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부분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많이 모자란다. 역대 정부의 집중화 정책 근시안적 경쟁력 시작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경제적 양극화, 인구의 양극화, 교육의 양극화 등으로 인해 점점 더 인구가 줄고 있는 현실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강인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투철한 정신력이 가미되어 충주발전에 모두가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온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행사로만 그치고 마는 충주시민의 날 행사보다는 충주의 날로 바꿔 시민의 강인한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국토의 균형 발전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인구가 늘 수 있게 정주연건을 갖출 수 있는 기반 확충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 중심에 충주의 역사적 정신 기반이 자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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