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3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5/13 [16:14]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3

김희찬 | 입력 : 2024/05/13 [16:14]

 

▲ 건너편 자동차전용도로에서 본 영곡사 산신각  © 충주신문

 

▲ 드론 촬영으로 찍은 영곡사 전경  © 충주신문


千仞巖頭千古寺 천 길 바위 머리에 천년 묵은 절

前臨江水後依山 앞은 강물에 임하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上磨星斗屋三角 위로는 별(星)에 닿았으니 집이 세 뿔이 났고,

半出虛空樓一間 반쯤 허공에 솟았으니 다락 한 칸이로다.

- 정지상, 「영곡사」, 『신증동국여지승람』권14, 충청도 충주목 불우조.

 

정지상의 시를 읽으며 정심사 앞을 지날 때마다 고민한다. 오를까? 말까? 정지상의 영곡사는 분명히 절에 오르지 않고 길가에 잠시 서서 올려본 풍광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그가 지났던 길은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신작로로 확장되었고, 해방 후에는 국도 3호선이 되었었다. 강 건너에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기면서 정지상이 지났던 이후로 가장 한갓진 길이 되었다.

 

천 길 바위는 삼초대로 불린다. 그 바위 위에 있는 천년 묵은 절은 산신각이다. 앞은 달내가 흐르고 뒤는 대림산 자락이다. 가파른 바위 위에 보이는 산신각은 뒷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붕 세 모서리만 보인다. 그래서 뿔이 세 개다. 반쯤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는 산신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구조이다.

 

정지상의 시는 한 폭의 풍경화로 읽힌다. 그 풍경을 보기 위해 작년 4월 <천리충주>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면서 걸었었다. 노오란 개나리가 흐드러졌었고, 달냇가의 수양버들은 봄바람에 살랑살랑 수염을 쓰다듬듯 하늘거렸다. 새잎이 돋은 나뭇가지에 가려서 산신각을 올려본 정지상의 시점을 그릴 수 없었다. 나뭇잎을 떨군 늦가을에도, 한겨울에도, 끝겨울에도, 초봄에도 일부러 찾았지만, 그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없었다. 골짜기를 차지한 나무 때문에 시로 그려낸 운치에 이를 수가 없었다.

 

정지상이라는 천재 시인의 기지(機智)였을까? 20세기에 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눈에는 10세기 전의 풍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건너편 자동차전용도로에 내려서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자동차의 위협을 무릅쓰고 보거나, 운좋게 드론 촬영으로 얻은 사진에 담긴 영곡사 산신각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을 하게 된다. 그나마 시에서 그린 정경을 보려면 가을이 지나야만 된다. 천년 전에 시로 그린 그림을 오늘 당장 보려는 것은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 사이 시를 곱씹어 음미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준비 시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시는 충주라는 이름이 생긴 이후(940년, 고려 태조 23년) 충주의 특정한 대상을 읊은 첫 시이다. 정지상은 충주를 지나며 <단월역>과 <분행역>에서도 시를 지었다. 천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서 하루 차이가 무에 그리 대수로우랴만은, 그 하루 차이로 정지상의 영곡사는 당당하게 충주를 노래한 시의 처음이 된다.

 

정지상이 그린 영곡사는 배경 색을 칠하지 않았다. 녹음이 지지 않은 계절임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영곡사에서 얻은 시상은 단월역에서 보태지고, 다음 여정으로 도착한 분행역에서 여정을 갈무리며 봄의 절정을 꽃피운다.

 

飮闌欹枕畫屛低 술에 취해 베개에 기대니 그림 병풍이 나직한데,

瞢覺前村第一鷄 꿈을 깨니 앞 마을에 첫닭이 운다.

却憶夜深雲雨散 문득 생각하니 밤 깊어 비 구름이 흩었는데,

碧空孤月小樓西 푸른 하늘에 조각달이 작은 누각 서쪽에 걸렸다.

- 정지상, 「단월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 역원조.

 

새재를 넘고 영곡사 앞을 지난 정지상은 단월역에서 하룻밤 묵었다. 저녁상에 반주로 곁들인 술에 취해 노곤한 여독을 풀며 잠들었다. 꿈에서 깨니 단월 어느 집의 첫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생각하니 간밤 늦게 비가 내렸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지 확인하려고 방문을 열어젖히니, 맑게 갠 푸른 하늘에 조각달이 누각 서쪽에 걸려 있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을 보며 남은 여정의 걱정을 덜었을 것이다.

 

새벽달이 걸렸던 단월역의 작은 누각은 ‘계월루(溪月樓)’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단월초등학교 운동장 앞 어디 쯤에 있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단월역을 떠난 정지상은 경기도 죽산현에 있는 분행역에 도착해 충주를 지나온 여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적어 충주자사에게 보냈다.

 

暮經靈鵠峯前路저물녘에 영곡봉 앞 길을 지났는데,

朝到分行樓上吟아침에는 분행루 위에 이르러 읊조린다.

花接蜂鬚紅半吐꽃은 벌의 터럭발을 접하곤 붉은 것을 반쯤 토하고,

柳藏鸎翼綠初深버들은 꾀꼬리 나래를 감춘 채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一軒春色無窮興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흥인데,

千里皇華欲去心천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回首中原人不見머리를 중원으로 돌이키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白雲低地樹森森땅에 내려앉은 흰 구름과 나무만 빽빽하도다.

- 정지상, 「분행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권8, 경기도 죽산현 역원조.

 

『동문선』에도 같은 시가 실렸다. 동문선에 실린 제목은 ‘分行驛奇忠州刺史’이다. 분행역에서 충주자사에게 보낸다는 것인데, 왜 이 시를 지었는지 짐작케 한다.

 

전날 저녁 단월역에 투숙했을 때 충주자사가 단월역에 나와 반주를 곁들이며 대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안전한 귀경을 위해 호위군사를 동행케 했을 것이다. 충주자사의 호의에 대한 답례로 이 시를 지어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동문선에는 ‘영곡봉(靈鵠峯)’이 아닌 ‘영취봉(靈鷲峯)’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충남 서천에 있는 영취산으로 번역자는 추정해 놓았다. 하지만 충주자사에게 보내는 시인데, 충남 서천이 등장하는 것은 어색하다. 특히나 어제 저물녘에 지난 곳으로 ‘영곡사’ 시가 있고, ‘단월역’ 시가 있는데, 충남 서천의 영취산 앞을 지났다는 것은 분명한 오류라고 판단했다. 결국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기록에 근거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분행역 기사에서 ‘영곡봉’으로 쓴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작품 제목에 충주가 처음 들어간 시이기도 하다.

 

<영곡사> → <단월역> → <분행역>으로 연결되는 노정을 놓고 보면, 정지상의 시 세 편은 온전히 충주를 노래한 시가 된다. 특히 이 시의 함련(頷聯)에 응축(凝縮)해 놓은 봄은, 분행역루에서 본 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충주의 봄이기도 하다. 열네 글자에 담긴 봄은 내가 이제까지 본 어떤 봄 풍경 묘사보다 아름답고, 가냘프며, 선명하고, 맛있다. 때론 선정적이기도 하다.

 

‘花接蜂鬚紅半吐 / 柳藏鸎翼綠初深’ 꽃(花)과 버들(柳), 벌(蜂)과 꾀꼬리(鶯), 붉음(紅)과 초록(綠), 앉음(接)과 감춤(藏), 반쯤 토해냄(半吐)과 첫 깊어짐(初深) 등 짝을 맞춘 글자는 기본이고, 띄어쓰기 없이 이어 붙인 열네 글자 사이사이에 불어넣은 봄의 숨결, 색깔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정지상은 ‘묘청의 난’(1135년. 고려 인종 13년)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참살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문집인 『정사간집(鄭司諫集)』도 사라졌다. 남은 시는 겨우 20편이 채 못된다. 그 중에 영곡사로 시작된 세 편의 연작시는 천년 묵은 충주를 옹골지게 담고 있다. 하지만 충주에서는 그것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낌인지 아까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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