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지지(地誌)류를 정리하며 중학교 때 배운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만 알던 내게 <영곡사(靈鵠寺)>, <단월역(丹月驛)>, <분행역기충주자사(分行驛寄忠州刺史)>로 이어진 연작시를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일이 있다. 그리고 충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로 남은 오래된 기록은 지금 이야기되지 않는다. 어쩌면 충주에 기록된 문학의 처음이고 시작인데 충주 사람은 잘 모르고, 또한 지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적은 현실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역을 자세히 보고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천리충주>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왜 노루목이라고 불렀을까? 한자로는 장항(獐項)으로 쓴다. 달천과 설운천이 만나는 지점에 붙은 이름인데, 모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을까? 사연이야 어떻든, 충주의 제영시로 <노루목>이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다.
충청도읍지에서 대거 확충한 제영시에는 노루목을 대상으로 유성룡의 시를 소개하였다.
野闊天回一望愁 들은 넓고 하늘은 낮은데 한 번 바라보니 수심일세. 中原歸路更悠悠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멀고 먼제, 山從劍石來方壯 산은 칼바위를 따라오니 어찌 그리 장관인가. 水遶金灘去未休 물은 금천을 에워싸며 가기를 쉬지 아니한다. 浮世幾人靑入眼 덧없는 세상에 몇 사람이나 푸르게 눈에 들어오나, 少年爲客白渾頭 소년 적에 나그네 되었는데 백발이 뒤섞였네. 惟將老淚供多感 오직 늙은이 눈물은 감정이 많아서, 灑盡千行寄北流 천 줄기 뿌리기를 다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는 물에 더하네.
- 유성룡, 「出獐項峽口 望忠州」, 『서애집』 권2. 및 『충청도읍지』 충주목 제영조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활약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 시 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충주를 지나며 지은 것이다. 문집에는 이 시에 대한 주가 하나 달려 있다. ‘나는 여덟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 고을에 있었다.(余八歲時隨先君子在此邑)’인데, 1549년의 기유옥사로 인해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었고, 첫 유신현감 이치(李致, 1504~1550)에 이어 부임한 이가 유중영(柳仲郢, 1515~1573)이다. 유성룡의 선군(先君)이 유중영으로 아버지의 임지였던 충주에 여덟 살 때 따라와 살았던 것을 주를 달아 밝힌 것이다.
노루목은 새재를 넘어 충주 지경에 들어서던 유성룡이 여덟 살 때 아버지의 임지였던 충주에 와서 살았던 추억의 회고인 동시에, 임진왜란 초기에 참혹한 전장이었던 탄금대에서 눈물을 흘린 회상 공간이다. 그러나 노수신의 <계탄서원기>를 보면 노루목은 팔봉서원 앞을 흐르는 달천이 탄금대 합수머리에 이르는 길목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칼바위[검암]를 지나며, ‘무표(霧豹)ㆍ운규(雲虬)와 금병(錦屛)ㆍ옥경(玉鏡)이 위아래로 두르고 좌우로 어우러져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서 세포(細浦)를 지나고 장항(獐項)을 거쳐 단월부곡(丹月部曲)에 이르러 협곡이 끝난다.’고 하여 계탄서원(팔봉서원)의 위치 설명을 하고 있다. 팔봉서원에 배향된 이연경이 용탄에서 배를 타고 합수머리를 지나 달천을 거슬러 오르는 물길을 설명한 것인 동시에 거기에 지표가 될만한 곳으로 단월부곡, 노루목, 싯계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곧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장인인 이연경(李延慶, 1484~1548)이 토계로 이사한 이자(李耔, 1480~1533)를 만나러 가던 여정이기도 하다.
노루목은 각자의 인식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유성룡과 강복성, 강복성과 강유선, 강유선과 이연경으로 이어지는 인연 관계에서 기묘명현과 관련된 제영시로 수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강복성(康復誠, 1550~1634)은 강유선(康惟善, 1520~1549)의 아들이며 이연경의 외손자이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5년에 강복성을 장수현감으로 추천한 사람이 유성룡이다. 강유선은 1549년에 일어난 기유옥사(己酉獄事)에 충주의 수괴로 지목되어 취조받던 중에 장살(杖殺)한 인물로 이연경의 사위이며 제자였다.
노루목에서의 단상을 뒤에 두고 대림산 자락의 잘린 길을 돌아서면 달천을 따라 활처럼 굽어 흐르는 대림산 벼라길이 이어진다. 그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정심사 산신각이 산 중턱에 보인다. 지금은 정심사로 부르지만 영곡사로 불리던 절이다. 영곡사 산신각을 바라보며 잠깐 걸으면 대림산성 입구를 만난다. 창동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옆으로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축대에는 ‘역사에 빛나는 항몽유적 충주 대림산성’이라고 써 놓았다.
대림산성(大林山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고적조부터 기록되어 왔다. 거기에는,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6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폐함(大林山城 石築 周九千六百三十八尺 內有一井 今廢)’이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는 ‘현의 남쪽 15리’라고 하여 방향과 거리를 기록하였다.
대림산성은 1253년에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金允侯, 미상) 장군이 지휘하여 몽고군의 2차 침공에 맞선 ‘충주 70일 항전’ 장소로 알려져 있다. 재작년까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료를 재검토하고 상황을 정리해본 결과, 충주산성으로 기록된 1253년의 그곳은 대림산성이 아니라 월악산의 덕주산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림산성은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충주 사람들이 피난해서 70여 일간 버틸 수 있는 공간 조건이 되지 못한다. 기록에서처럼 우물 하나가 식수원이고, 계곡이 있긴 하지만 수량이 넉넉하지 않다. 노루목 쪽으로 열린 서문 안쪽 골짜기를 따라 계단식으로 평지가 있지만, 1만 명 이상을 수용하여 장기간, 그것도 한겨울에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다. 성 밖에 진을 치고 있었을 몽고군 역시 공간이 없다. 강 건너에 새로 닦은 길과의 사이에 백사장을 예로 들 수 있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다. 더구나 한겨울에 바짝 마른 대림산을 불화살로 공격할 경우, 순식간에 불구덩이가 된다.
작년에 870주년을 맞은 1253년의 승리를 기념하여 몇 개의 세미나가 있었다. 충주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는 충주 읍성이 1253년의 충주산성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교통대 박물관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는 난데없이 계족산성이 충주산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설이라는 평가를 하지만, 현장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대림산성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경계로 살미면과 단월동이 나뉜다. 1990년대의 홍수선을 표시해 놓은 벼랑이 위태롭고 앞으로 뻗어있는 길에는 작년 여름의 수해 흔적이 역력하다. 산사태에 대비한 모래주머니가 즐비한 길을 걸어 영곡사로 향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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