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잊힌 곳, 숨은 이름 찾기(한강 수운에서)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1/25 [16:24]

141. 잊힌 곳, 숨은 이름 찾기(한강 수운에서)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4/01/25 [16:24]

 

이제는 배를 타고 서울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거의 없다. 1928년 12월 25일에 충북선이 충주역까지 연장 개통하면서 운송 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나마 황색연초 수송을 위해 꾸준히 이용되었던 뱃길마저 물량의 감소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930년생이라고 하더라도 아흔 살이다. 그 세대의 일부만이 이용했었을 뱃길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증언을 들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충주를 이야기할 때, 한강 수운의 이용은 이 지역 발달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이야기된다. 물류 수송, 지금의 유통체계의 중심에 수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인지[鄭麟趾, 1396(태조 5) ~ 1478(성종 9)]가 표현한 ‘인후지지(咽喉之地)’ 외에 생겨난 충주의 역할 용어가 바로 ‘물중지대(物衆地大)’였다. 인후지지가 군사전략적인 요충지로서의 충주를 표현한 것이라면, 물중지대는 물류 유통에 있어서의 역할을 강조한 말이다. 물중지대라는 표현의 배경은 육로를 이용한 집중과 수운을 이용한 서울로의 수송에 있다. 그 반대도 성립된다. 그리고 수운의 이용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창(倉)의 설치와 변경에 관한 것이다.

 

창의 설치는 세곡(稅穀)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흥창(可興倉)

 

예전에는 덕흥창(德興倉)이라 하였다. 또한 경원창(慶原倉)이라고도 하였다.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 예전에는 금천(金遷)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 때[1465, 세조 11]에 여기로 옮기고 경상도 여러 고을과 본주의 음성ㆍ괴산ㆍ청안ㆍ보은ㆍ단양ㆍ영춘ㆍ제천ㆍ진천ㆍ황간ㆍ영동ㆍ청풍ㆍ연풍ㆍ청산 등 고을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실어 날라 서울에 이르는데, 수로로 260리이다.

 

【신증】 예전에는 창사(倉舍)가 없었는데 금상(今上, 중종) 16년(1521)에 비로소 집을 지었다. 모두 70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 충주목 - 창고조)

 

대량의 물건을 수송하는데 있어서의 수운은 시간과 비용 면에서 여러 가지 이점이 많았다. 수운은 물류 수송뿐만 아니라 서울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이 되기도 했다. 기행문, 일기 등의 기록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김종직의 예에서 이용 실상을 확인해 본다.

 

1473년(성종 4, 계사년)가을, 43세 되던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 ~ 1492(성종 23)]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충주에 도착하여 배편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탄금대 합수머리에 있었던 금휴포(琴休浦)에서 배를 타고자 했다. 마침 세미(稅米) 운반철이라 배삯을 터무니없이 부르는 까닭에 포기하고 원(院)과 역(驛)을 이용해 서울로 갔다.[忠州不得舟行, 時方載稅米, 議價不下吉貝二十錠](김종직, 『점필재집』 권5)

 

▲ <1920년대 금휴포>탄금대장례식장이 위치한 합수머리 지점에 있던 포구였다. 일반적으로 충주에서 배를 타고 서울에 가고자 할 때에 출발 승선지였던 곳이다. [자료:충주시청]



충주에서 서울로 배를 이용하고자 할 때 가장 가까운 곳은 금휴포였다. 금휴포는 1920년대 사진에서 ‘계선대와 탄금대’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는 장소이다. 1913년 충주시구개정이 진행될 당시에 별도로 개설한 신작로가 탄금대 금휴포까지 이어진 길이다. 이것은 현재 부민약국 삼거리에서 탄금대 장례식장으로 이어진 길이다. 1912년에 황색연초 시험재배 성공을 시작으로 늘어나는 물량을 수운을 이용해 서울 용산연초제조창으로 수송하기 위해 닦은 길이다. 당시 담배는 전매품목으로 권련을 만들어 판매한 막대한 이익금을 일제는 조선 통치에 필수였던 경찰 운영 등의 기본 재원으로 삼았다. 대량 물류 수송의 방편으로 수운을 택했던 것이고, 이것은 요즘말로 가성비가 상당히 좋은 운송 수단이었다.

 

한편 김종직은 1476년(성종 7, 병신년)추석 밑, 46세 때에 노모 봉양을 위해 선산부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의 일정도 그의 문집에 보인다. 8월 9일에 서울을 출발, 10일에 경기도 광주를 지났고, 11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출발하여 가흥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해 이틀 만에 가흥에 도착해서는 역을 이용해 임지로 향했다. 서울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편은 보통 가흥에서 정박하여 육로를 이용하였다.

 

이에 앞서 김종직은 1468년(세조 14, 무자년)4월 초 4일에 금천(金遷)에서 배를 타고 월락탄을 지나 가흥에 도착해 하룻밤을 묶기도 했다. 이 때 월락탄에서 기녀 셋이 배를 타고 뒤따랐다고 한다. 일종의 호객행위의 한 장면을 기록해 놓았다. 그날 저녁 가흥에 머물며 보았던 상황은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지어 생생한 현실을 표현하기도 했다.

 

충주에서 뱃길을 이용해 출발하기 좋은 곳은 금휴포였고, 반대로 서울에서 충주로 올라올 때에 닿기 편한 곳은 가흥이었다. 가흥으로 창을 옮긴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배를 탈 때마다 기록한 김종직의 시편들은 수운의 물류 수송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용 상황을 알려준다.

 

같은 곳에서 배를 타고 내리면 편리할 텐데, 왜 두 곳으로 나뉘었을까? 이것을 설명해 줄 숨은 이름이 바로 ‘막희락탄(莫喜樂灘)’ 또는 ‘막흐레기여울’이라고 부르던 목계와 가흥 사이의 여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여울에 대한 지지류의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뱃길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시편에서 당시의 지명과 의미 등이 확인된다.

 

1562년 명종 17년에 휴가를 받아 고향 안동에 다녀오던 구봉령[具鳳齡, 1526(중종 21) ~ 1586(선조 19)]의 <기행시(紀行詩)>의 한 대목이 있다. 김종직처럼 금천에서 배를 타고 월락탄을 지난 다음에 사공이 해 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磨虛暗礁大灘惡(마허암초대탄악) 마허의 암초 대탄보다 험하니

 

古來幾多隨沈殀(고래기다수침요) 예부터 얼마나 물에 빠져 죽었나

 

黃帽爭指人鮓甕(황모쟁지인자옹) 사공은 서로 사람젓갈 단지라 칭하나

 

壯心傲睨如池沼(장심오예여지소) 장한 마음에 보통 못처럼 얕보았네

 

- 구봉령, 『백담집』 속집 권3, 칠언배율 중에서

 

▲ <막흐레기여울>목계와 가흥 사이의 여울이다. 1910년에 측도된 1:5만지형도의 부분으로 국수를 말아 놓은 듯한 것이 여울이다. 보통 ‘막희락탄(莫喜樂灘)’, ‘막흐레기여울’로 불린다. 16세기에는 ‘마허탄(磨虛灘)’ 또는 ‘마흘탄(麻訖灘)’이라고 기록되었고, 당시 사공들간에는 ‘사람젓갈단지(人鮓甕)’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여울의 이름은 마허(磨虛)라고 했다. 마허탄이다. 그곳에 이른 사공은 “저 앞에 여울이 사람 많이 잡아먹는 여울이지요. 그래서 우리네는 ‘사람젓갈단지(人鮓甕)’라고 부른답니다.” 정도의 이야기를 했나보다. 그래서 구봉령은 ‘사람젓갈단지’라고 부르던 사공의 얘기를 기록해 놓았다.

 

1564년(명종 19)박승임[朴承任, 1517(중종 12) ~ 1586(선조 19)]이 남긴 시에서도 동일한 코스로 배를 탔던 기록이 있다. 여기에 막희락탄의 다른 이름이 등장한다.

 

灘惡名麻訖(탄악명마흘) 험악한 여울 이름은 마흘인데

 

倉高見可興(창고견가흥) 높은 창고를 보니 가흥이구나

 

長洲船幾舳(장주선기축) 긴 모래톱에 늘어선 배 고물은 몇 개인지

 

亂石浪千層(난석랑천층) 어지러운 돌에 천 겹 물결이 인다

 

短棹隨波舞(단도수파무) 짧은 노는 물결 따라 춤을 추고

 

輕篙遇險憑(경고우험빙) 가벼운 상앗대는 귀신 붙은 듯하다

 

臨深心自小(임심심자소) 깊은 물에 임하니 심장이 쪼그라들어

 

尺地每兢兢(척지매긍긍) 가까운 땅을 보며 매양 조마조마하구나.

 

- 박승임, 『소고집』 권2, 시 중에서 <가흥>

 

‘마흘탄(麻訖灘)’이라고 등장한다. 바닥에 돌이 많아 물결이 심하게 일었다. 그 물결에 짧은 노와 삿대는 물결 따라 휘청, 귀신 붙은 듯 사공의 손놀림이 정신없다. 그 공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두려움은 가까이 보이는 가흥에 닿으려고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막희락탄(莫喜樂灘), 막흐레기여울로 부르는 여울 이름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마허탄(磨虛灘)’ 또는 ‘마흘탄(麻訖灘)’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그 여울의 험난함에 두려움은 기본이고, 수많은 인명사고로 인해 붙은 사공들간의 별칭이 ‘사람젓갈단지(人鮓甕)’이기도 했다.

 

이용이 중지됐지만, 이용할 당시의 상황과 사정은 각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충주의 성장 배경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던 뱃길, 즉 수운(水運)에 대한 접근도 새롭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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