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성내동 문화회관 옆에 있던 충주교육청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 자문위원회가 있었다. 지난 12월부터 정밀발굴을 시작해 대략적인 결과를 보이는 자리였다. 그 자리는 충주읍성의 연당(蓮塘)이 있었던 곳이다. ‘충주읍성 광장 및 주차장 조성부지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는 ‘충주읍성의 연당터 발굴조사’ 정도가 맞을 것이다.
발굴 조사 결과 다행스럽게도 연당 안에 있었던 석가산(石假山) 모양이 드러났다. 또한 청녕헌에서 석가산으로 놓였던 길도 바닥돌이 확인되었다. 한켠에는 집터도 하나 확인되었다. 그리고 연당의 상당 부분이 KT와의 사잇길과 KT 주차장 쪽에 묻힌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혼선도 있었다. 당초 1907년에 충북관찰부공립소학교 건물을 지을 때 성벽의 돌로 연당을 메웠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천운정(天雲亭)이 옮겨지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그 자리에 교육청 건물이 신축될 때 연당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도 기록되지 않아 사실관계 파악에 혼선이 있었다.
충주시청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광장과 주차장을 조성할 목적이었지만, 연당 복원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돌이켜보면, 누천년 역사 속에 사라진 것이 더 많다. 충주의 경우 역사시대의 이야기 중에 오래된 것이 용산(龍山)과 관련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산상에 작은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하여 <용산(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용산 마루에 있는 못은 규모는 작았지만 너무 깊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용이 살고 있다고 전해져 신비롭게 여겼고, 용이 승천할 경우 마을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탄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이 못을 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못가에 짙은 안개가 끼면서 흰 구름이 하늘로 이어지고 천둥 번개와 함께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잠시 후 조용해지고 구름이 걷혔다. 용이 승천한 것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용이 승천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더욱 그 못에 치성을 다하였다.
그 후 충주 고을이 고구려 치하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름있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명기(明氣)있는 곳의 혈을 질렀다. 어떤 풍수쟁이가 이 용산을 보고 ‘이 고을에 왕이 탄생할 기운이 있다’고 하여 이를 누르는 뜻에서 못 옆에다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눌렀다고 한다.(<충주중원지>, 1985. p.953.)
1912년에 충주전매지청을 건립하기 위해서 못도 메우고 석탑도 헐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도 가끔 탑의 초석으로 보이는 돌조각이 발견되기도 한다.
1965년에 종전의 건물이 낡아서 전매지청을 새로 지을 때의 일이다. 신축공사하는 건물 위에 용의 발자국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실을 알아본 결과 슬라브 시멘트가 채 굳기 전에 무슨 새(큰새?)의 발자국이 약 1m 간격으로 두 개씩 4개가 있고, 그 사이에 비늘모양의 무늬가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이 지방에 무슨 경사라도 날 것이라는 쑥덕공론이 떠돌았으나 별무신기(別無神奇)한 일이었다.(장기덕, <중원향토기>(1), 형설출판사, 1977. p.175.)
전국에 용산은 많다. 그렇다고 그게 흔한 이름도 아니다. 그렇지만 용산을 파괴하고 이름만 남은 곳이 충주 외에 또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충주 용산은 아직 존재하는 산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의 용산동에 있는 산이다(고도:207m). 산상의 작은 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지방 향토 사료에 의하면 용산의 작은 못에 용이 살았다는데 용이 승천하면 마을이 번영하고 큰 인물이 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충주 고을이 고구려 치하에 들어갔을 때 풍수가가 충주 고을이 왕이 탄생할 기운이 있다고 하여 용산에 못을 파고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눌렀다고 한다. 용산에서 이름이 유래된 용산동에서는 예전에 용의 승천제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1995년 충주시군 통합을 기념하여 거룡승천제를 거행하여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용산초등학교와 용산아파트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용산 [龍山, Yongsan]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혹자는 엄정에 용산이 있다고 위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정의 용산리는 용현리(龍峴里)와 토산동(兎山洞)의 두 마을을 하나로 묶으며 만든 이름이다. 1914년의 일이다.
용산을 꺼낸 이유는, 작년부터 주위에서 움직이는 마을해설사 교육을 보며 느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용산동을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용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용산이 없는데 용산을 어떻게 이해하란 얘긴가. 개념상의 용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용산은 어른들의 얕은 생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단어일 뿐이다.
우리 주위에 있었던 역사적 공간과 건물을 비롯한 시설을 충주 시내에서 찾아보려고 해도 쉽게 볼 수가 없다. 천년 역사도시의 곳곳에 별로 보이는 게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것들의 파괴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시작됐다. 대표적인 예가 충주읍성의 성벽을 파괴하여 지금의 시가지를 만든 것이다. 상징공간이며 제의공간이었던 사직단(社稷壇)을 비롯해 성황사(城隍祠), 여제단(厲祭壇) 같은 것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일본화된 개화의 물결을 타고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해왔다. 그 결과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기록에는 오래된 모습이 남아있지만, 실제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 결과를 되짚어보면, 실질적으로 마지막 명을 끊은 것은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행한 것들이 더 많다. 사직산의 사직단을 일본 신사가 들어와 1차적인 공간파괴를 했지만, 그것을 복원할 수 없는 상태로 배수지로 만든 것은 결국 우리였다. 혹자는 사직산의 배수지를 파가저택(破家瀦澤)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형벌에는 없지만, 왕조시대에 역적에게 내려진 조치로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웅덩이나 못을 만들었던 것을 파가저택이라고 한다. 깊은 물에 담궈 그 영혼조차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한 일이다. 생전의 존재를 깨끗이 지워버리는 엄청난 일이다. 사직산의 그것을 파가저택에 비유하는 일은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르지 않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富)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武力)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하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백범 김구,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던져준 충격은, 지금 여기에서 개념으로 세상을 기억해야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의 시작에 대한 고민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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