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보동을 지나 옛길을 따라 돌고개로 오른다. 수안보역이 만들어지면서 수안보온천으로 들어서는 진입로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조산공원(趙山公園)이라는 이름으로 일대의 정비공사도 마쳤다. 돌고개에 올라서면서 왼쪽의 조산(趙山)을 보면 주차장이 새로 만들어졌고, 그 아래에 몇 기의 묘가 있다. 그 묘의 주인공 중 하나가 조정철(趙貞喆, 1751 ~ 1832)이다. 造山이 아닌 趙山으로 부르는 이유가 어쩌면 조정철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새로 만든 주차장에는 그 사연을 새긴 안내판이 세워 놓았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이야기> 조정철(趙貞喆, 1751 ~ 1831)은 조선후기 충청도 감사를 지낸 인물로 25살에 문과에 합격한 후 1777년(정조 1년)에 정조 시해 음모사건[丁酉逆變]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할 뻔했으나 증조부 조태채(趙泰采)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 홍윤애(洪允愛, ? ~ 1781)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조정철의 심부름을 하던 홍윤애는 음식 수발은 물론 옷감을 팔아 붓, 종이, 서책을 구해주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에 조정철도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다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고 딸까지 낳게 되었다. 그런데 원수 사이였던 소론(小論)의 김시구(金蓍耉, 1724 ~ 1795)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조정철을 없애기 위한 구실을 찾으려고 홍윤애를 붙잡아 고문했지만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죽음으로써 조정철을 지켜냈다. 이에 김시구는 제주도 유배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허위보고를 올렸으나 박원형(朴元衡)이 어사로 파견되어 보고내용이 허위라는 것이 밝혀져 김시구는 파직되었다. 결국 조정철은 무혐의로 풀려났고 여러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1805년(순조 5년)에 비로소 29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유배가 풀리고 복직된 이후 1811년(순조 11년) 61살의 나이에 제주목사 겸 전라방어사가 되었다. 부임 하자마자 헤어졌던 딸을 만나 홍윤애의 묘소를 찾아가 비를 세운 뒤 홍윤애를 추모하는 시를 새겼다. 조정철은 후에 1813년부터 1815년까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831년 사망하자 이곳에 안치되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가슴시린 이야기는 소설과 뮤지컬로 재탄생되었으며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 홍윤애의 묘소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다.
장장 29년이라는 유배생활과 유배객 조정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제주 여인 홍윤애의 슬픈 사랑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정철의 묘로 확인된 것이 1995년이다. 200년 넘게 잊혔던 이야기가 되살아난 것이 겨우 3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는 홍윤애의 목숨을 건 사랑이야기를 제주 여인의 정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부각시켜 올해 7월에는 창작 뮤지컬로 재해석하여 기억하고 있다. 1996년 이후에 홍윤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이나 행사를 꾸준히 만들어 내고 있다. 수안보역이 개통되면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예상하기 어렵지만 제주시와 충주시간에 오작교(烏鵲橋)가 놓이는 것을 기대한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환갑에 제주 목사가 되어 홍윤애의 묘를 찾은 조정철이 남긴 사랑 노래는 이렇다.
<홍랑의 묘 앞에서 [題洪娘墓]>
瘞玉埋香奄幾年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誰將爾怨訴蒼旻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黃泉路邃歸何賴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 碧血臟深死赤緣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어서도 인연이 이어졌네 千古芳名蘅杜烈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 형두꽃처럼 빛나리 一門雙節弟兄腎 한 집안 두 절개, 어진 형제였네 鳥頭雙闕今難作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는 일어나지 못하니 靑草應生馬鬣前 푸른 풀만 무덤 앞에 우거져 있구나 - 조정철,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
앞서 보았던 임진왜란 상황에서 충주 남쪽의 신충원(辛忠元)과 북쪽의 조웅(趙熊)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상황이나, 작은 새재로 오르는 산기슭에 있었다는 개 이야기와 엄정면의 개비 거리이야기, 그리고 기록적인 유배 생활을 했던 조정철이나 역사적 인물로 장기간의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용의 부모형제가 묻혔던 금가면 하담, 근대사의 격변을 몸으로 겪어야 했던 안부역과 가흥역의 상황은 모두 시대를 달리하지만 충주의 남쪽과 북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음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조산공원에서 잠시 쉬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하고 돌고개를 넘는다.
돌고개에는 서낭당이 있다. 돌고개는 수안보와 대안보의 경계로 온정원(溫井院)과 안부역(安富驛)의 경계였던 곳이다. 옛날에 마을과 마을의 경계가 되는 고개 길목에 서낭당 하나쯤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돌고개 서낭당>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서낭당이 있는 것에 걸맞게 주변은 큰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길손들의 쉼터로 제격이다. 그리고 고개 이쪽과 저쪽 길에는 벚나무가 심겨 있어서 매월 4월에 열리는 수안보온천제 즈음에는 벚꽃이 활짝 펴 벚꽃길이 되고 있다. 그곳의 길이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벚나무의 안녕이 걱정되었으나, 들어보니 벚나무 바깥을 걷는 길로 확장하고 벚나무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한다. 다행 중에 다행이다. 돌고개 서낭당에는 올해도 새 금줄을 두르고 있다.
2019년에 수안보 마을조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수안보온천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변천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수안보온천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차고 넘치지만, 먼저 수안보온천을 두고 괴산군 상모면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충주군으로 편입 운동을 크게 벌였던 사실이 있다.
1933년부터다. 수안보온천이 활기를 띄면서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1933년 12월 5일에 괴산군 상모면 온천리 주민을 대표하여 천야팔태랑(川野八太郞;카와노 하치타로), 성야죽치(星野竹治;호시노 타케지), 좌좌목영조(佐佐木榮助;사사키 에이스케), 임순도(林淳道), 한상리(韓商履), 심만택(沈晩澤), 정영모(鄭英模), 홍원균(洪元均) 등 8명이 괴산군, 충주군, 충청북도를 각각 방문해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을 진정했다.
편입을 진정한 이유는 ‘괴산군 상모면은 전조선적으로 자랑할만한 수안보 온천장을 소유하고 또한 다른 지방에 밑지지 아니할만한 천연의 미를 하였음으로 매일 욕객과 탐승인들의 답지(遝至)로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되었으나 행정구역이 현재 괴산군인만큼 충주군과의 거리는 5리, 괴산군과의 거리는 10리 이상의 원거리, 그 뿐 아니라 충주간은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교통 두절이 아니 되나 괴산간은 조금만 비가 와도 몇 날씩 교통 두절이 된다.’는 것이 표면상 이유였다.
1933년 말에 점화된 상모면의 충주군 편입 운동은 1935년 9월에 재점화되었다. 1936년 전반기까지 대대적인 면민대회를 통해 결속하며 진정하였지만 인가되지 않았다. 괴산군과 충주군의 갈등 과제로 남아있던 이 문제는 1962년에 가서야 정리되어, 1963년 1월 1일자로 당시 중원군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월악산의 하늘재가 충주 땅으로 있게 되었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괴산군 연풍면과 수안보를 왕복하는 104번 괴산 시내버스는 당시 생활권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이고, 실질적인 이유 중의 하나로 수안보에는 병원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제천시 덕산면 사람들이 과거에 충주를 생활권의 중심에 두었고, 그 흔적으로 덕산면까지 하루 네 차례 왕복하는 충주 시내버스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제천시 덕산면의 경우 1912년까지 충주군 덕산면으로 존속했으며 충주의 동창(東倉)이 송계리에 있었다. 걷기를 계획하며 때로 현재 시군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군말은 뒤로 두고 53℃의 뜨끈뜨끈한 수안보온천, 온정원(溫井院)의 이야기를 따라 돌고개를 내려 걷는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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