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1960년대 충주에 세운 반공 위령ㆍ추모비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48]

105. 1960년대 충주에 세운 반공 위령ㆍ추모비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48]

 

충주에 몇 기의 비석이 동시다발적이며 경쟁적으로 선 때가 있다.

 

① 반공투사 유공 동렬 선생 기념비(1961. 8. 15. 충주중학교 교정, 충주중고교 학생)

② 반공투사 이공 경준 추모비(1961. 8. 31. 계명산 중턱, 충주사범학교 학생)

③ 반공투사 장공 재형, 장공 원섭 충혼비(1961. 9. 6. 연수동 앞산 기슭, 충주여중고 학생)

④ 목계 반공투사 묘소 정비 및 투쟁기록 게시판 건립(1961. 9. 목계솔밭. 신명중학교 학생)

⑤ 남봉우 선생 기념비(1961. 9. 9. 남봉우 선생 묘소. 충일중ㆍ충주농고 학생)

⑥ 박명섭, 김장열 반공투사 기념비(1962. 10. 31. 호암동 수청골 공동묘지, 충주중고교 학생)

⑦ 반공투사 김원기 기념비(1962. 10. 31. 연수동 공동묘지. 충주여중고 학생)

⑧ 목계 반공투사 기념비(1962. 11. 6. 중앙탑면 장천리(목계솔밭), 반공유적부활운동 충주시 중원군위원회)

 

①의 유동렬의 비석에 대해서는 2016년 9월 16일자 잊힌 이야기로 소개한 바 있다.

 

②의 이경준은 1950년에 청년방위군으로 입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10월 14일에 월악산 공이동 부근에 무장공비 40여명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듣고 30여명의 대원을 진두지휘하여 10여명을 생포, 20여명 사살의 전과를 올리고 본인도 희생됐다고 한다. 3대 독자였던 그는 슬하에 1남 2녀의 어린 자녀를 남겼고, 미망인도 1961년 3월에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군인도 경찰도 아닌 신분이어서 적당한 예우나 구호책이 없어서 안타까운 상태라고 했다. 이에 당시의 충주사범학교에서 전담하여 그의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③의 장재형은 1950년 당시 대한청년단 연수동 단장이었고, 장원섭 씨는 동 단의 총무였다고 한다. 6.25가 발발한 후 1950년 7월 5일에 이웃이었던 좌익 청년 5명에게 체포되어 연수동 공회당에서 감금 고문을 받고 7월 20일에 연수동 앞산 모래포에서 희생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충주여중고에서 전담하여 그들의 충혼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 이면에는 ‘6.25 괴뢰 남침시 붉은 마수에 희생된 반공투사 고 대한청년단 연수동 단장 장재형님과 동 총무 장원섭님 두 분의 반공애국정신을 추모하고 길이 빛내기 위하여 이곳에 충혼비를 세웁니다. 단기 4294년(1961) 9월 6일’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④의 기사는 장천리에 소위 목계솔밭에 안장된 이들과 관계된 일이다. 엄정의 신명중학교 학생이 전담하여 묘소를 보수하여 떼를 입혔고, 그들의 활동을 소개한 게시판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는 다시 1962년에 ⑧과 같이 반공유적부활운동 충주시ㆍ중원군위원회에 의해 목계 반공투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⑤의 남봉우는 해방 후 6.25 당시에 충주농고 및 충일중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좌익학생을 선도하여 존경받던 인물이라 하는데, 그런 저간의 사정에 의해 6.25 공간에서 엉뚱하게 트집을 잡혀 호암지 근방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선생이 재직했던 충주농고와 충일중학교에서 전담하여 기념비와 안내판을 세웠다고 한다.

 

⑥의 박명섭과 김장열은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상에 희생된 경우이다. 1947년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에 걸쳐 진천군내 곳곳에서 좌우대립에 의한 폭동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충주, 음성, 진천의 국민회원이 응원차로 출동하였다고 한다. 8월 29일 이월면에서 격돌이 있었고, 이후 귀로에서 이월면 사곡리 고개에 잠복했던 좌익 500여명의 투석 습격으로 현장에서 2명이 즉사하고 42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에 현장에서 사망한 2명이 바로 충주에서 건너간 박명섭과 김장열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충주중고교에서 전담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 <위> 박명섭 김장열 <아래> 김원기 기념비 제막식 장면(자료: 충청일보. 1962. 11. 5. 2면 1단)  

⑦의 김원기에 대한 행적은 소상치 않다. 다만 1962년 10월 31일 오후 4시 30분에 연수동 공동묘지에 안치된 그의 묘소에서 충주시장 이상태, 중원군수 이준영 씨를 위시한 각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의 전담은 충주여중고 학생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⑧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61년도에 신명중학교 학생들 전담으로 묘소 정비와 게시판 설치에 후속한 연차사업으로 보인다.

 

이상의 7건에 대한 비의 건립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기적으로 1961년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시기를 정해놓고 추진된 점이다.

 

대상자들은 또한 민간인 희생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충주에는 이미 1955년에 탄금대에 세워진 충혼탑(忠魂塔)이 있다. 여기에는 군인, 경찰, 군속 등의 6.25 및 그 전후 희생자들의 위패를 봉안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현충시설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부분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몇몇 사례발굴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각 사업을 전담한 곳이 직간접의 연고가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의 중등학교였던 충주중학교와 충주고등학교, 충주사범학교, 충일중학교와 충주농업고등학교, 충주여자중학교와 충주여자고등학교, 신명중학교 등이 모두 나누어 맡아 진행했다.

 

이상은 1961년과 1962년 충청일보에 소개된 기사에 근거한 것이다. 시대적 단면이 담긴 기사를 통해 현재까지 존속되고 관리되는 비가 몇 개인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의 단면들을 보다 종합적이며 포괄적인 차원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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