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신작로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것이 운행되는 초기 상황이고, 그에 따라 길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확장되거나 고쳐지는 상황에서의 변화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정리한다. 하나는 차동차 영업(서울-충주간)의 시작과 그 길을 자동차를 타고 경험했던 초기 기행문(?), 그리고 탄금대 길에서 일어난 기록상의 첫 교통사고에 대한 것이다.
충주에 자동차라는 물건이 언제 처음 달렸는지는 모른다. 1905년에는 흔하지 않았겠으나 러일전쟁 후에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이란 명목으로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의 수송 수단 중에 상당수의 차량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규모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1936년 1월 3일자 매일신보에는 <현대 조선 원조 이야기>의 첫 연재기사가 실렸다. <교통편>에서 자동차 영업의 원조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전략)… 그러면 이 자동차가 뛰어들어 먼저 뉘 손에서 장안의 거리를 질주하게 되었으며 또 그 때는 어느 때쯤 되었을까? 손꼽아 헤아려보매 세월이 유수하여 어느덧 23년 전, 즉 대정 2년(1913)이었다. 그때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 청년으로 조선에도 자동차가 필요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고 황금정 1정목에 사무실을 두고 경성 충주(忠州)간에 승합(乘合) 자동차 영업을 개업하게 되었으니 그가 즉 지금 동일은행(東一銀行) 중역으로 있는 민대식(閔大植) 씨이다. …(후략)… (매일신보. 1936. 1. 3. 2면 3단. <현대 조선 원조이야기, 그것은 누가 시작하였던가? (교통편)(1)>
1913년에 서울과 충주를 왕복하는 승합자동차 영업이 민대식(閔大植)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황금정 1정목에 사무실을 두었다고 하니 지금의 을지로 1가 쯤 된다. 당시 운임은 10리에 30전씩이었다고 하며,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수가 부족한 까닭에 한 번 타려면 적어도 1주일 전부터 차표를 사두고 예약해야만 했다고 한다. 당시에 운행했던 차량은 사각의 덮개가 있던 포드 자동차였다. 자동차라는 것을 처음 보는 만큼 어떤 사람은 그 움직임을 보고 무슨 짐승인가 쿡쿡 찔러보는 사람도 있었고, 포장(덮개) 속에 번갯불이 들어 있어 올라타면 불에 타죽는다는 말까지 나돌아 타고 싶은 사람도 무서워서 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똥벼락을 퍼붓기도 하고, 시골길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는 초군목동들이 잠복했다가 돌멩이를 들고 나와 자동차를 습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56년 충북신보(忠北新報)에 일본 정강대학(靜岡大學) 조교수 석교무언(石橋武彦)의 글이 3회 연재된 바 있다. 이 글은 기고자의 부친이 1911년 12월에 천엽현(千葉縣) 국부대(國府台)의 야포 17연대에 현역병으로 입대해 1913년에 상등병으로 진급한 후 헌병에 지원하여 교육받고, 다시 1915년 5월에 한국특별주헌병 충주헌병분대 단영분견소로 전속한 후 1919년 11월 퇴역할 때까지 기록한 수기의 일부를 번역 소개한 내용이다. 여기에 보면 1915년 단양분견소 전속을 명받고 가는 노정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충북신보. 1956. 6. 25 ~ 27(3회 연재). 각 2면 1단. <그 아들이 폭로한 일헌(日憲)의 행장기> 참고)
1915년 1월 15일 전시근무로부터 해임되고, 4월에 조선 헌병을 배명하여 6월 15일에 일본을 떠나 6월 17일에 부산에 상륙한 후 (기차로) 대구, 대전, 조치원을 경유, 청주헌병대 본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철도는 여기(청주)까지 밖에 없었다. 청주로부터 충주까지 약 18리(한국리수 180리)이고 거기(충주)서부터 산속 깊이(단양) 약 10리이며 그 사이에 무엇 하나 교통기관이라고는 없다고 했다. 물론 청주에서 충주를 거쳐 단양까지 걸어서 갔다고 했다. 그만큼 차량 편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1915) 청주-충주간은 직거자동차부(織居自動車部) 청주영업사무소에서 격일로 승합차량 노선 운행을 시작한 시기였다.(잊힌 이야기 81번 참고) 그리고 <충북자동차회사>가 인가를 신청해 놓은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충주는 읍성을 허물고 시가지를 차량 통행이 가능한 직선형 도로로 만드는 시구개정이 한창인 때였다.
이후 1925년에 김동진(金東進)의 <영월행(寧越行)>(동아일보. 1925. 5월 11, 13, 16, 20일(4회 연재)이라는 기행문에서 서울과 충주를 잇는 노선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확인된다. 그는 1925년 5월 2일 아침 8시 반에 서울에서 영월행 자동차에 탔다. 승객은 본인과 외사촌 누이, 충주에 간다는 일본인 여자, 제천까지 간다는 60여세 노인 한 분이었다.
종로를 빙 돌아 황금정(을지로)을 가로질러 왕십리를 지나서 광장리 광나루에 다달았다. 거기에서 똑딱선이 밧줄로 끌어 한강을 건넜는데, 약 10분이 걸렸다고 한다. 달리는 차는 쿠션이 좋지 않았고 길 또한 비포장이어서 달리는 내내 부딪히고 튕기며 시달려야 했다. 11시 25분에 이천읍에 도착했고,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다시 곤지암, 장호원을 지나 충주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 40분경이었고 서울에서 250리 거리였다고 한다. 7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물론 이때 달천을 건넌 수단은 도선(渡船)이었고, 제천을 향해 가며 건넜던 목행 역시 도선(渡船)이었다. 충주에 도착한 차는 멈추고 다시 제천행 자동차로 갈아탔고, 거기에는 제천행 우편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제천으로 출발한 시각이 4시경. 그가 잠시 보았던 충주는 이렇다.
취우(驟雨)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도회라기보다도 장(場)거리 같이 초가가 즐비한 충주시가의 일부를 내다보면서 4시경에 출발을 하였다. 충주는 조선인 지사의 관할이라 전에는 색(色)으로 명진팔도(名振八道)하든 박지사(朴知事;朴重陽)가 계셨고 지금은 박래품(舶來品)으로 유명한 악수명관(握手名官) 김지사(金知事;金潤晶)가 목민의 관으로 계시니 시설에 여간이 아닌 모양이다. 가위 적자적임(適者適任)
그렇게 덜컹거리며 불편했던 서울-충주간의 도로 사정이 그나마 나아진 상황이었을 것인데, 여전히 충주는 퇴락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자동차가 다니다보니 교통사고도 났다. 충주에서 찾아지는 첫 교통사고는 1916년에 보인다. 앞서 1915년에 운행하기 시작한 직거자동차부의 차량이 운행노선을 이탈해 탄금대로 향하다가 생긴 일이다.
10월 2일 직거자동차부의 정기자동차는 충주에 정류하는 중 인가를 받지 않고 지정선로 이외 되는 탄금대로 향하여 몰아가다가 오전 11시 30분 충주군 읍내면 탄금리 4통 8호 농민 전우상(全右相)의 맏아들 옥돌(玉乭), 세 살된 아이와 다른 아이 두 명이 길에서 놀고 있던 중 옥돌이는 자동차가 앞으로 닥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피할 줄을 몰라 어릿어릿하는 것을 그 모친 김용(金用)(25)은 위태함을 돌아볼 겨를 없이 길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구하였으나 속력을 내어놓은 자동차는 내려가는 언덕으로 빨리 몰던 터이라 그만 걷잡을 사이 없이 길의 오른편으로 피난코자 하는 김용을 바퀴에다가 감아가지고 한칸 반이나 끌어나갔으므로 김용이는 그만 기절이 되었는데, 운전수 좌좌목이는 크게 놀라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응급치료를 하고자 하였으나 코와 입으로부터 피가 많이 나와 사태가 용이치 아니함으로 즉시 충주로 돌아와 산기 의사를 데리고 가서 구고한 까닭으로 일시는 소생하였으나 그 이튿날 오전 2시 폐장파열상(肺腸破裂傷)으로 죽었으므로 좌좌목 운전수는 충주헌병분대의 취조를 받았는데, 죽은 김용의 남편 전우상이는 운전수 좌좌목이와 충주정류소 주인 우야좌평이가 한번 위로라든지 피해할 당시의 사실을 어름어름하여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까닭으로 그리되었다고 죄를 벗어나려 할 뿐 아니라 더구나 죽은 지 사흘이 지나도 즉시 자동차부에서 유족에게 위로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등한히 있음을 분히 여겨 변호사 이원국 씨에게 의뢰하여 고소의 절차를 행하는 중인데 고소의 결과는 어찌될른지 자식을 구하려다 자기가 참혹히 죽은 그 모친만 불쌍하더라.(매일신보. 1916. 10. 10. 3면 4단. <살인하고 의기양양, 악마같은 자동차 부원>)
아이를 살리려다 죽은 어미의 한만 남은 사건이 충주에서 찾아지는 교통사고 기사의 처음이다. 자동차가 달리고 그에 따라 신작로가 열리면서 편리해진 면도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새로운 불상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 역시 신작로 개설에 따른 자동차 운행에서 비롯되기 시작했다. 불과 100년 남짓한 세월 속에 묻힌 이야기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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