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탄금대로, 충주에 개설된 첫 신작로 ③(누가 득봤을까?)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6:36]

83. 탄금대로, 충주에 개설된 첫 신작로 ③(누가 득봤을까?)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6:36]

 

신작로 개설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힘들지만, 자료를 보면 재미있는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고촌심일(高村甚一;다카무라 징이치)이다.

 

1915년에 발행된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의 앞쪽 화보를 넘기다 보면 ‘달천 고촌 건조실(達川高村乾燥室)’이라고 이름붙인 사진 한 장과 설명이 있다. 즉 ‘달천건조실은 충주 본정 고촌심일 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대정 3년(1914)에 8칸을 건축하고 본년도(1915)에 이르러 12칸을 증건 중으로 엽연초 경작반별 26정보와 그 지도원 및 전매국 출장소의 추천으로 내지인 2명을 초빙 전담하여 그 경작을 장악해 명년도(1916)에는 현재의 배액(倍額) 이상의 경작에 착수할 예상으로 있고 장래 유망 사업으로 관측된다’라고 하였다. <충주시구개정>과 그에 부수된 <탄금대>까지의 신작로 개설의 이유인 엽연초 경작과 관련된 대표적인 재충주 일본인으로 구체적인 사업 확장 단계의 첫 모습이 사진 한 장과 그 설명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는 같은 책의 광고면에 <미곡상(米穀商)> ‘충청북도 충주 본정, 고촌심일’로, 또한 직업별 인명 소개란에 농업(農業) 분야 17명의 일본인 중의 하나로 실려 있다.

 

이가 충주에 정착한 것은 1902년으로 얘기된다.(<한국근현대인물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편) 참고) 이에 앞서 그는 1895년에 경성에 처음 왔고, 1898년 6월부터 조선파견 임시 헌병대 통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00년 3월에 사직하고 미곡상ㆍ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하며 1902년에 충주를 근거로 토지 경영, 육군에 납품하며 충주에 정착한 초기의 일본인으로 확인된다. 미곡상으로 영업했지만, 1914년부터는 새로운 각광 작물인 엽연초에 직접 간여하며 건조실을 만들고 그에 대한 경작지 확장 등도 힘썼으며, 이후 충주에 잡화상을 열어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생계의 기본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1914년의 고촌심일의 이혼 관련 기사에 의하면 ‘…(전략)… 충청북도 충주군 남변면 1부동에 사는 강소사는 동군 동면 3부동에 사는 자기 남편 되었던 내지인 고촌심일을 피고로 삼아 공주지방법원 민사부에 소송을 일으키었다는 말을 들은즉 강소사는 열일곱 해 동안을 고촌이와 결혼 동거하여 마침내 아들 하나까지 낳고 아무 탈없이 재미있게 잘 살아오다가 재작년(1912) 음력 9월에 피차에 의논하고 이별하기로 작정하여 …(후략)…’라는 대목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1897년에 이미 충주 여인과 인연을 맺어 살아왔고, 그로 인해 충주에 정착한 원인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매일신보. 1914. 10. 25. 5면 5단. <동화혼(同化婚)의 부동화(不同化)> 참고.)

 

충주를 근거지로, 개척된 식민도시의 유력자로 성장해온 고촌심일의 행적이 1927년에는 서울에서 등장한다. 김태우의 책 <서울의 공동체 의례와 주도집단>(민속원. 2018)에는 서울의 부군당(符君堂) 조사과정에서 1925년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서빙고 부군당의 중수기의 기부자 명단을 통해 ‘외지인이면서 유일한 일본인으로 고촌심일(高村甚一)이 있다’고 밝혔다. 미곡이든 엽연초든 충주에서 모집된 물품은 수운을 이용해 서빙고 지역까지 운반해내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그는 1936년에 거금 56만원을 경성부에 기탁하며 재단법인을 설립했고, 그것을 매개로 성동중학교(城東中學校)를 개교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변모한 상황에서 국방비 1만원 헌납, 경기호(京畿號;전함) 건조비에 500원 갹출, 1939년 4월 충주중학교 기성회에 1만원 기부, 1944년 사이판 복구헌금 10만원 기탁, 1945년 4월 ‘경성고촌호(京城高村號)’라는 해군기 헌납까지 했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주를 배경으로 일군 부(富)를 유감없이 사용했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가 간여된 소송 중에 눈여겨 볼만한 것이 1934년 기사에 있다. 즉, 농지령(農地令)이 발포되면서 소작농과의 분쟁이 심각하던 시기에 충주의 최대 사건이 고촌과 그의 소작농과의 분쟁이었다.(매일신보. 1934. 4. 6. 5면 5단. <농지령 발포 앞두고 소작권 이동 격증> 참고)여기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그가 충주에 얼만한 재력을 행사하고 있었는가를 추정할 수 있다.

 

① 고촌심일(高村甚一)을 상대로 충주군 가금면 이건흠(李建欽) 외 24명의 종래의 사음(舍音) …(후략)

② 동인을 상대로 충주읍 칠금리 권영교(權寧敎)외 25명이 사음 …(후략)

③ 동인 고촌심일을 상대로 동량면 용교리 손이정(孫理鼎, 사음 병 소작인) 급 금가면 원포리 이삼룡(李三龍) 외 31명이 …(후락)

 

가금ㆍ칠금ㆍ금가ㆍ동량면의 상당한 면적의 농지를 확보하고 그 지주로써 그가 존재했던 것이 확인된다. 그의 충주에서의 첫 직업이 공식적으로 미곡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미곡상이 아니었다.

 

쌀을 매개로 장사를 시작하며 충주에 정착한 것이 1902년부터이고, 1914년에는 충주의 새로운 부의 원천인 엽연초 재배와 그 경작지 확장에도 간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확인된다. 그리고 그는 그때 이미 충주에 이주ㆍ정착하는 일본인들에게 원로로 칭송되었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15년의 달천고촌건조실을 화두로 끄집어낸 이유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그리고 충주에서 무엇보다 먼저 탄금대까지 연결한 신작로가 우선 개설된 것과 관련해 가장 모범적이며 존경받았던 고촌심일(高村甚一)의 존재는 식민지에서 뽑아낼 자양분의 대표적인 자본 생산과 관련해 가장 앞선 사람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즉, 탄금대까지의 신작로 개설은 충주를 중심지로 쏟아지는 엽연초 수송도로의 확보였지만, 달천에 대규모 건조실을 만들고 거기에서 직접 배로 실어내는 고촌심일은 또다른 면의 담배농사 나아가 종합적인 경영자의 혜안 아닌 혜안이 보이기 때문이다.

 

확대해석하거나 소설을 쓰기에는 부족하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 벌어진 구체적이며 세부적인 식민지화 과정에서 고촌심일이라는 한 사람이 가지는 의미는 그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또한 100년 지난 지금 뒤늦은 의문을 던지는 이유이며,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찾아야 하는 충주의 단면이란 생각에서 충주에 이주해 와 정착한 식민도시 지배자들의 속속을 밝혀보자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만 학문 영역의 문제만이 아닌 충주라는 지역 사회의 삶과 성장에 있어 왜곡되거나 굴절된 현상을 찾을 수 있는 시작점이라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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