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 속편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4/01 [16:59]

47.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 속편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4/01 [16:59]

 

서회보와 관련된 지난 기사가 의도와 다르게 친일 문제의 소재로 변질되었다. 그의 친일 여부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좀 더 소상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회 끝에 언급한 충주박물관을 방문했던 사람은 서회보의 증손자였다. 서회보(徐晦輔, 1849~1919)의 장남 서중순(徐重淳, 1876~1908), 그 서중순의 장남 서상경(徐相庚, 1900~1962), 그 서상경의 장남(1938~현재)이었다. 어렵게 그와 통화를 하고 서회보, 서천순, 서상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상에 정리되어 있는 서회보의 출생지는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라고 했다. 그러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지곡리(芝谷里)로 확인된다. 운양 김윤식(1835~1922)에게 청했다던 팔가정기(八可亭記)의 그 팔가정이 예산에 있었던 정자라고 한다. 그것의 추가 기록이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보인다.

 

24일 계묘(癸卯). 반나절은 맑다가 반나절은 흐렸다. 오후에 잠깐 비가 뿌렸다.

 

지곡(芝谷) 감찰(監察) 서회보(徐晦輔)의 집에 갔다. 오늘은 혜춘(惠春)의 아들 관례일이었다. 그 백씨(伯氏)인 온양(溫陽) 군수 만보(晩輔)도 와서 만났다. 팔가정(八可亭)에 올랐는데, 정자는 곧 띠로 이은 자그마한 정자였다. 정자를 연못의 물이 둘러싸고 연못에는 백련(白蓮)을 심었는데, 전당연자(錢塘蓮子)라고 한다. 연못에 겨우 두세 명이 탈 만한 작은 배가 있어 줄을 당겨 건넜다. 정자 위에는 제각[題刻, 글씨를 새긴 현판]이 많아 서까래가 거의 뵈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국 시랑(侍郞) 서수명(徐壽銘)의 시문이 많았다. 율객(律客)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금슬(琴瑟)・생소(笙簫)・해금(奚琴)・장구(杖鼓) 등도 구비되어 있었다. 술이 반 순배 돌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술자리를 파하고는 작별을 고하였다. 저녁이 임박하여 화정(花井)으로 돌아왔다.(김윤식, <면양행견일기> 중 음력 1893년 9월 24일자)

 

지곡(芝谷)은 서회보의 집이 있는 지명을 뜻한다. 1908년 기사에 서회보의 장남 서중순(徐重淳)이 32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했다. 역산하면 서중순이 17세 되던 때 관례(冠禮)를 행했고, 마침 그날 운양 김윤식이 서회보의 집에 간 것이다. 서회보의 형인 서만보(徐晩輔)도 온양군수로 재직하며 조카 관례일에 맞춰 참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증손자와의 전화통화에 의하면, 서회보는 예산 지역에서 화랑(畵廊)을 경영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그런 화랑을 이야기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중에 그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는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또한 서회보는 기공(氣功)을 수련했다고 하는데, 그에게 기공을 배운 일본인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와 인연에 의해 1905년 영동군수로 발탁된 것이고, 그 연장으로 1908년 충주군수로 이임해 1917년까지 있었던 것이다.

 

신니면 송암리의 집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세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신니면에 자리한 것은 1908년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니면에 있었다던 또다른 선정비는 지금 받침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비는 증손자에 의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정지리 선영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증손자의 얘기로는 비가 있던 원위치인 신니면에 옮길 생각도 있다고 한다. 만약 이 비가 원위치로 돌아온다고 하면, 충주에 때아닌 친일논쟁이 불붙을 것이 예상된다.

 

▲ <서상경과 동지들> 왼쪽 두 번째 인물이 서상경이라고 한다.[사진출처 : 서회보 증손자 블로그에서 캡처]  

서회보가 친일 인사인 것은 그가 가졌던 관직과 시기의 문제이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친일이라는 것이 결국 1908년 충청북도 관찰부의 청주 이전을 수긍했고, 또는 1910년 경술국치 후에도 군수직을 영위했다는 점, 그가 행한 여러 가지 선정(善政)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재임 중에 행해진 <충주시구개정>에 의한 충주읍성의 파괴는 충주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해 행해진 여러 정책에 부응한 부일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서회보의 둘째 아들이 서천순(徐千淳, 1901~1964)이다. 손자는 서상경(徐相庚, 1900~1962)이다. 둘 다 1925년 흑기연맹(黑旗聯盟) 사건과 1929년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 사건의 주역인 아나키스트들이다. 여기에 대소원면의 서정기(徐廷夔, 1898~1950)까지 모두가 한 집안이다. 한참 생각해야 할 아이러니다.

 

관아공원에 있는 서회보의 선정비를 보면서 그 공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충주시에서는 충주읍성복원계획에 대한 용역 발주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이 지난 5월 29일 등록문화재 제683호가 된 후 활용방안에 대한 용역 발주를 했다고 한다. 다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것이 충주시립미술관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제 곧 충주교육청이 이사를 한다. 그 공간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동일 공간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의 충돌로 인해 모든 것이 꼬인 것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서회보의 선정비가 있다. 그 결정적인 시공간이 지금 여기가 아닌 충주군수 서회보의 책임하에 그려지고 시행된 <충주시구개정>과 <충주시구개정도>에 의해 사라진 충주읍성에서 시작된 100년이 조금 넘은 일이란 점에서, 우리가 과연 충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있는 것인가 의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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