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서원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충렬사강당에 걸려있는 몇몇 중수기(重修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82년 10월 윤득서(尹得緖)가 지은 <충렬사강당중수기>, 1942년 9월 상순에 송소용(宋炤用)이 짓고 김종현(金宗鉉)이 쓴 <중수기>가 걸려있다. 또한 1954년 1월 상순에 김태진(金泰鎭)이 지은 <충렬사중수기>와 1965년 음력 2월 상순에 정희원(鄭熙源)이 지은 <충렬사중수기>가 있어 함께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충렬사지(忠烈祠誌)』(2006)에는 1777년 (음)6월 9일 충렬사강당 상량식 날에 서재(西齋) 당장(堂長) 장지한(張志漢)이 쓴 <충렬사강당상량문>이 실려 있어서 지금에 이르는 과정의 첫 점을 찾을 수 있다.
장지한의 상량문에는 먼저 1727년 영조 3년에 사액(賜額)되던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옛 터에 사우(祠宇)를 짓고, 이에 몇 개 기둥을 세워 방을 만들어 진상(眞像)을 모사해 벽에 걸었는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卽舊址而營祠 爰置數架屋子 摸眞像而揭壁 粤自五十年前)
1727년 사액을 계기로 충렬사를 재건하고, 여기에 1726년 모사한 초상을 사우 벽에 걸어둔 사실을 정확히 50년 전이라고 했다. 앞서 살펴본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과 일치한다. 50년의 세월이 지나며 퇴락함에 생도(生徒)들이 중건의 뜻을 비치고 여러 선비가 힘을 모아 시작한지 3개월 만에 강당 공사가 이루어져 상량식을 가졌다. 공사를 책임진 이들은 이광일(李光一), 윤득서 등이었다. 옛 규격에 따랐지만 공력은 배가 되었다. 용마루를 높여 공의 지절(志節)을 형상했다. 또한 처마 밑에 코끼리를 두어 공의 기상(氣相)이 지붕을 덮도록 하였다. 충렬사강당 앞면 처마 밑의 두 마리 흰코끼리 상의 의미가 여기에서 풀린다.
공사를 마치고 1782년에 윤득서가 지은 중수기에는 공사 전 과정의 개략이 정리되어 있다.
1775년(乙未, 영조55)에 이광일, 이양보(李亮輔), 반광서(潘光緖) 등과 같이 강당 중수의 뜻을 모았다고 한다. 여러 진신(搢神)과 의논하여 각 주진(州鎭)의 뜻을 모아 1777년(丁酉, 정조원년) 봄에 우선 10칸(十楹) 강당을 짓고 겨우겨우 기와를 얹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공사가 정지되었다. 1778년(戊戌, 정조2) 여름 정조가 5영(營)에서 모은 800민(緡)을 내려 보냈고, 당시 목사 박사옥(朴師沃)과 영장 박진양(朴晉陽)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우와 강당에 안담장을 두르고 신문(神門, 내삼문)을 세워 차례로 보수해 나갔다. 그러던 중 기황(饑荒)이 들어 자재 수급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신임 목사 이지광(李趾光)이 부임하여 관첩(官帖)에 남은 돈을 내어 이적(李迪)에게 역(役)을 전담시켰다. 1781년(辛丑, 정조5) 겨울에 준공 기한을 정해 역할에 따른 구획을 나눠 공사를 이어갔다. 그 결과 1782년(壬寅, 정조6)에 다시 10칸 집을 지어 좌우에 동ㆍ서재(東西齋)를 두었고, 외삼문을 세웠다. 새로 기와를 얹었고 바깥 담장도 완성하여 가을에 모든 공사를 마쳤다. 그 완공을 맞아 1782년 10월 상순에 윤득서가 지은 강당중수기가 현재 충렬사강당 안에 걸려있다.
이것을 보면 현재 충렬사가 독립 건물로 있고, 그 앞에 강당이 있었다. 그 중간은 신문(내삼문)을 세웠고, 담장으로 보호했다. 또한 강당 10칸과 동ㆍ서재를 각각 10칸 집으로 지어 강당 좌우에 배치했고, 외삼문을 세우고 담장으로 둘러 2개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전당후사(前堂後祠)의 기본 구조에 충실한 완전한 형태의 서원이 되었다. 이것이 곧 충렬서원(忠烈書院)이었다.
이 후 133년 뒤에 퇴락하여 충렬사와 충렬사강당만 남은 사진이 일제강점기에 찍힌 흑백 사진이다. 이 사진의 실물에 앞서 1942년의 중수기에는 1897년 참령 장기렴(張基濂)과 군수 정기봉(鄭基鳳)에 의해 한 차례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40년(庚辰)에 이윤흠(李允欽)ㆍ전태진(全泰鎭)ㆍ이남훈(李南薰)ㆍ임병달(林炳達)ㆍ류재홍(柳在洪)이 여러 사림 및 본손(本孫) 임순천(林淳天)과 함께 서원의 재정으로 정전[충렬사], 2개 비각, 강당 10칸, 창고 4칸, 외삼문, 동서 협문을 중수 또는 신건(新建)하고, 1943년(癸未) 가을(9월)에 서까래와 마룻대[최동(榱棟)], 주춧돌과 지도리[초사(礎戺)]를 제 위치에 잡고, 담장과 단청을 마쳤다고 한다. 이 때에는 동ㆍ서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1953년(癸巳) 여름에 장마 피해가 있었다. 달천이 넘쳐 정전[충렬사]이 무너지고[正殿頹圮], 비각이 쓸려 나가고, 재실(齋室)이 무너지고, 담장도 붕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당시 충주군수 정희택(鄭喜澤)이 현지를 둘러보고 과반의 출자를 했고, 의연금을 모아 10여만 원으로 복구하여 1954년 정월 상순에 낙성하였다고 한다. 의연금을 낸 사람 이름은 충렬사강당에 판각하여 걸려있다.
그 뒤에 ‘임충민공유적정화사업’이 진행되어 1978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이 때에 충렬사강당은 해체 이전하여 지금 위치에 놓였다. 내삼문과 외삼문을 두었지만, 동ㆍ서재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원 공간의 기준이었던 강당의 이전으로 ‘충렬사’로서의 모습만 강조되어 서원의 흔적과 설명은 사라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우인 충렬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임경업 장군 한 분만 단독 배향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을 배향하며, 동시에 그 승급의 차를 두는 경우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따로 두는 경우가 많다. 향교의 대성전 좌우에 동ㆍ서무를 두고, 명륜당 좌우에 동ㆍ서재(東西齋)를 두는 공간 구조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단월 충렬사의 경우에는 임경업 장군 단독 배향인 관계로 동서무 없이 충렬사가 사우로 있는 것이다.
1697년 충렬사 창건을 시작으로, 1782년에 완성된 구조를 갖췄다. 이후 어느 시기부터 충렬서원은 퇴락해갔고 추가적인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강당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1978년 유적정화사업이란 명목으로 충렬사 공간만 강조되어 서원의 의미는 완전히 퇴화되었다. 다만 당초 사액하면서 원토(院土)로 주어진 재산 등기상의 이름으로 충렬서원(忠烈書院)이 존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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