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3월, 충렬사에 대한 사액 결정이 있은 후 예문관에서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정해 내려줌으로써 <忠烈祠>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액호가 결정되고 그것을 써서 단월에 편액(扁額)을 봉안할 때에 ‘충렬사봉안제문(忠烈祠奉安祭文)’은 조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장암집(丈巖集)]에서 확인된다. 또한 충렬사의 편액을 걸고 첫 제를 올릴 때에 제문은, 장암과 집안이며 당시 정언(正言)으로 지제교(知製敎)였던 정우량[鄭羽良, 1691(숙종 18) ~ 1754(영조 30)]이 쓴 것으로 『임충민공실기』에서 확인된다.
이로써 당시 충주목 관내에는 팔봉서원[八峰書院, 1582년(선조 15) 창건, 1672년(현종 13) 사액, 이자(李耔)ㆍ이연경(李延慶)ㆍ김세필(金世弼)ㆍ노수신(盧守愼) 배향], 운곡서원[雲谷書院, 1602년(선조 35) 백운서당에 주자의 위패를 모시고 백운서원으로 개칭, 1661년(현종 2)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며 운곡서원으로 개칭, 1676년(숙종 2)에 사액], 누암서원[樓巖書院, 1695년(숙종 21) 창건, 1702년(숙종 28) 사액, 1724년(경종 4년) 사액 취소, 1725년(영조 1) 회복, 송시열(宋時烈)ㆍ권상하(權尙夏) 배향] 등 3개의 사액서원에 1개가 더해져 4개의 사액서원이 있게 되었다.
영조는 1730년 봄에 영릉(寧陵)을 참배한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의 진달(進達)에 따라 임경업의 묘에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 중 1730년(영조 6) 11월에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 1602(선조 25)~1674(현종 15)] 장군의 합향(合享)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갔다. 충주 유림 중에 진사 이명하(李明夏)를 대표로 하여 올린 상소인데,
…(전략)… “동향의 노인들은 모두 ‘모두 우리 고을 사람이고 동일한 시대이며 행한 일이 동일한 의리였으니 예(禮)에 있어서 동일하게 제향해야 하는데, 이때에 함께 거행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는가. 만약 마침내 민몰(泯沒)되어 버리고 공론이 펴지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 향당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참람하고 외람된 것을 헤아리지 않고 우러러 거듭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소서.”…(후략)… (『승정원일기』, 영조 6년(1730) 11월 26일자 20번 기사)
동향(同鄕)인 이완을 같은 무관에 대한 예로써 충렬사에 합향하여 동일한 예우를 받게 해달라는 논지였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정익공[이완]이 성조와 뜻이 맞은 것은 백년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으니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합향하자는 청은 그것이 온당한 줄을 잘 모르겠다.[而合享之請, 殊未知其得當矣.] 무릇 요사이 유자들은 학업을 일로 삼지 않고 단지 이런 일들로 일로 삼으니 내가 일찍이 병통으로 여겼다. 그대들은 물러나 그대들의 학업을 닦으라.” (『영조실록』, 영조 6년 경술(1730), 11월 26일자 20번 기사 중에서)
영조의 합향에 대한 의문과 함께, 당시 충주는 1728년에 4월에 있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된 이조겸(李祖謙) 등에 의해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된 직후였다. 충주뿐 아니라 21개 목ㆍ부ㆍ군ㆍ현이 강등 등의 조치를 당했다. 애매한 때에 합향을 주장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한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으로 인해 민진원과 정호가 파직된 상태여서 조정 내의 유력한 우군이 사라진 상태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임경업의 단독 배향이 유지된 것이다.
▲ <1921년 충렬사 전경> 오하라 토시타케(大原利武)가 1921년 충주지방 일반조사를 할 때 촬영한 사진이다. 뒤쪽의 한옥은 충렬사(忠烈祠)로 초상이 모셔진 공간이다. 현재의 충렬사 제향 공간에 해당된다. 중간의 한옥은 충렬서원 강당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오른쪽 끝의 건물은 비각이다. 담장이 둘러졌던 외곽 공간은 파괴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만큼 관리가 되지 않아 급격한 훼손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충북충주 단호사 전경>이라고 제목을 달아 놓았다. 제목 수정이 요구된다.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 충주신문
|
정조 때에는 여러 가지 조치가 있었다.
먼저, 재위 초기인 1778년(정조 2)에 승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의 건의로 서원 수리가 진행됐다.
도승지 홍국영이 아뢰기를,
“충주 달천(㺚川)에 있는, 고 충신 충민공 임경업의 서원이 오래되어 무너져서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 신이 일찍이 명을 받들어 지방으로 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다 보고는 마음이 아팠었는데, 지금 듣자하니 유손(遺孫)이 서원의 선비들과 함께 연전부터 목재는 대충 마련했으나 물력(物力)이 넉넉지 못하여 아직까지도 수리를 못하고 있다 합니다.
신이 여러 장신(將臣)과 이 점에 대하여 상의한 바가 있습니다. 삼군문(三軍門)에서 각각 200금(金)을 내고,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양영(兩營)에서 각각 100금을 내어서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고, 또 본주의 목사 및 영장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여 즉시 수리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승정원일기』, 정조 2년 무술(1778) 4월 20일자 8번 기사. 같은 내용의 요약이 『일성록』과 『정조실록』의 같은 날짜에 있음.)
정조는 서원 수리의 이유를 그의 동생 임형업(林亨業)을 정려할 때에 밝혔다. 즉 “달천서원(㺚川書院)에 대해서 연전에 특별히 삼영문(三營門)에 명하여 물력(物力)을 보조해서 즉시 보수하게 한 것은 절의(節義)를 표장(表獎)하려는 뜻에서였다.”(『승정원일기』, 정조 8년 갑진(1784) 11월 3일자, 32번 기사)라고 하여 그의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다. 그리고 정조는 충렬사를 ‘달천서원(達川書院)’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장을 보고 상황을 보고한 홍국영도 ‘서원(書院)’이라고 말했다. 1787년(정조 11)에도 수리한 일이 확인된다.
두 번째는 임경업에게 시호를 내린 일이다. 1788년(정조 12) 5월 26일과 27일자에 보이는 내용이다. 제사를 지내라 명하였다. 제문은 정조가 직접 썼다. 당초 6월 2일로 정했으나, 정조가 쓴 제문에 초하루라고 하였기 때문에 6월 1일로 바꾸고, 제물인 예찬(禮饌)으로 원식(原式) 외에 양(羊)이나 돼지(猪) 중에 하나를 더 쓰라고 했다.
그런데 ‘충민(忠愍)’이란 시호는 1706년(숙종 32)에 이미 내렸었다. 다시 시호를 내리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정조의 언급이 있다.
“…(전략)… 충혼(忠魂)과 의백(毅魄)은 정영(精英)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후손을 녹용하는 일을 이미 시행하였지만 다시 시행하고, 치제하는 은전을 이미 행하였지만 또 시행하는 것은 먼 후세에 공경하고 사모하는 심정이 내가 참으로 유독 충민공에 대해 특별하였기 때문이다. 선시하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으니 너무 지체된 것이 애석하다. 선시하는 날에 직손(直孫) 중에 임태원(林泰遠)과 같이 관직에 있는 자가 아직 내려가지 못했다면 말미를 주어 내려가게 하라. …(후략)…” (『승정원일기』, 정조 12년 무신(1788) 5월 27일자 2번 기사)
‘내가 참으로 유독 충민공에 대해 특별하였기 때문[予實獨別於忠愍]’이라는 의미는 정조 시기에 행해진 일련의 일에 대한 충분한 단서가 된다.
세 번째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전이 내려졌다. 1788년(정조 12) 11월 14일에 임경업의 5대손 임태원(林泰遠)을 불러 친견하며 충렬사의 상황과 제사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또한 자손이 빈한한 까닭에 관리가 잘 안되므로 관에서 수시로 살펴 관리하게 하였지만 원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조는 원우(院宇)와 함께 계단과 담장 등을 즉시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네 번째는 서원전토(書院田土)를 하사했다. 빈한한 집안 형편을 고려한 조치였다.
다섯 번째는 임경업의 묘를 지키며 관리하는 수총(守塚) 3호(戶)를 경보군(京保軍) 중에서 획급하도록 조치했다.
여섯 번째는 초상이 색이 바래 새로 모사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도화서의 화공을 정해 내려 보내서 모사하게 조치하였다. 모두 1788년 11월에 취해진 조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