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모작 –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대모가 된 미망인 F씨

허억 | 기사입력 2020/04/07 [09:34]

인생 2모작 –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대모가 된 미망인 F씨

허억 | 입력 : 2020/04/07 [09:34]

▲ 허억 명예교수(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면역학교실)     ©

남편과 사별한 후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많은 번민과 갈등을 이겨내고 무남독녀인 딸을 잘 키어 결혼시킨 후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살고 있는 F씨의 인생이야기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F씨는 유복한 유림의 가정에서 태어나 유림의 가풍을 익혀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막내딸이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어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과 첫 돌 후 친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얼마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방황의 터널을 벗어난 후에는 새엄마를 전보다 더 사랑하며 서로의 애틋함을 교감하면서 잘 지내게 되었다. 알고 보면 새엄마도 연민의 대상인데 이혼녀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린 자녀를 때어놓고 새롭게 출가한 처지로서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의 나날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친자식이 보고 싶어도 어느 누구한테 말 못하는 가련한 신세로써 한평생을 살다 F씨의 결혼 한 달 후에 평소 앓든 지병으로 한 많은 세월을 뒤로 한 체 세상을 하직했다.

 

남편은 대학시절 만나 5년여 동안 친구로서 사귀다가 결혼한 그 당시 흔하지 않은 연애커플이다. F씨는 서울에서 유명한 종합 학원 수학 선생이었는데 워낙 인기가 많아 대형 강의실에서 하루에 3회 강의를 할 정도로 수강생들이 많았다. 반복되는 강의와 더불어 대학 입학 상담이 많다 보니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서울 학원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험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상한가를 치는 스타강사였다. 학원 강사 2년 후 독립해 수학 학원을 개업해 대성공 가도를 달렸다. 대성공 이후에 따르는 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 왔고 그 학원이 입주한 건물을 개업 1년여 만에 매입해 건물주 학원 원장으로 변신했다. 부와 명성을 함께 얻은 F씨는 그 당시 학원가의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국산 고급차도 많지 않은 시절에 포르쉐를 운전하며 서울 학원가를 종횡무진 질주했다.

 

남편은 투자 전문가인 펀드 매니저 일을 하였는데 많은 고객들이 평창, 북창, 강남의 부자들이었다. 그 고객들 중에는 F씨의 학원 학부모들도 많이 있었다. 그 당시 증권가엔 장바구니 들고 객장에 오는 사모님들이 많을 정도로 주식과 펀드가 일상 대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주식공화국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펀드 매니저 일을 했으니 백억 대의 투자금을 쉽게 모았고 많은 수익을 내었다. 학원 스타강사인 아내와 많은 투자자를 가진 남편 이들 부부를 상상만 해도 한 폭의 멋진 그림이 아닌가 말이다. 이러한 멋진 한 폭의 그림이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많은 투자처의 부도로 인한 회수 불가능한 투자금과 많은 투자금 수익손실로 남편은 하루아침에 빚쟁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 F씨를 믿고 투자한 학원 학부모들을 비롯한 많은 투자자들이 투자금 반환 독촉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이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니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F씨 부부를 사기꾼으로 매도했고 학원가에서는 F씨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남편 빚을 갚기 위해 학원빌딩을 매매해 빚을 갚고 모자라는 돈은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빚 청산을 하였다. 그 후 학원도 접고 조용히 지내다 친정아버지의 권유와 도움으로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러시아에 있으면서 많은 고려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의 애환과 어려운 실상을 보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아픔을 느꼈다. 1960년대 러시아에서 록 가수와 영화배우로 유명한 고려인 2세인 빅토르 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귀국해서는 빅토르 최에 대한 추모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귀국 후 F씨는 사회봉사활동과 경제활동을 하였고 남편은 모 은행에서 투자자문 일을 하였다. 남편의 펀드 부도 이후 가정의 모든 경제권과 실권은 F씨가 주도했다. 남편은 부도로 인한 죄책감에 F씨가 하자는 대로 따라 가는 편이였고 가정의 화목을 위해 무슨 일이든 F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식사, 빨래를 비롯한 잡다한 집안의 모든 일은 남편의 몫이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남편은 가정주부이며 마당쇠였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남편은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아내 F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무슨 일이든 했다. 이런 가정주부와 마당쇠 역할을 한지 9년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급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2주 만에 한 많은 세상과 이별하였다.

 

평소 F씨는 남편만 안 보고 살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멀리 떠나보내고 나니 텅 빈 마음속이 왜 이리 허전한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후회해 보았다. 사별 후 언제부터인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아쉬움이 가슴 시리게 스미어왔다. 금융 부도를 냈다고 남편을 원망하면서 가정부로서 마당쇠로 대우했든 철없든 날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이젠 모든 것을 잊고 남편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사회봉사하며 하루하루 겸손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에서 고생, 설움, 차별을 감내하며 사는 고려인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봉사활동하고 있다. 봉사활동 일환으로 고려인 직업학교를 설립해 교장 겸 한국어 선생으로서 그들을 위해 열의와 성의를 다해 보살피고 있다. 또한 그들의 취업, 임금체불해결, 비자연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방팔방 뛰고 있다. F씨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들의 진정한 대모이며 F씨 또한 그들의 진정한 사랑의 대모로 살고 싶어 한다. 남편이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렸지만 퇴근 후 집에 오면 왜 이리도 적적하고 쓸쓸한 지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아려온다. 부부란 있을 때 모르지만 없으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실감해 본다. 우리네 인생살이 별 것 있나 미우나 고우나 부부가 같이 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에서의 소풍놀이 마감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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