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모작 – 혼자 몸으로 두 아들 훌륭하게 키운 70세 현대판 신사임당 E씨

허억 | 기사입력 2020/03/03 [09:48]

인생 2모작 – 혼자 몸으로 두 아들 훌륭하게 키운 70세 현대판 신사임당 E씨

허억 | 입력 : 2020/03/03 [09:48]

▲ 허억 명예교수(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면역학교실)     ©

여자 혼자 몸으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E씨 아주머니의 굴곡 많은 인생사를 말하면서 우리 모두가 험난한 인생역경을 어떻게 슬기롭게 승화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E씨는 평범한 집안의 첫째 딸로 여상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한 평범한 가정 주부였다. E씨 남편은 공대출신으로 건설회사에 입사한 지 12년차 되던 설날에 고향을 찾아 쉬고 있는데 고향 친구가 부모님께 세배 인사차 부모님 집에 들였다. 남편친구는 공고 졸업 후 집안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중견 건설회사 현장 소장 일을 하고 있는 중이였다. 남편과 남편친구는 건축얘기를 오래 하면서 내린 결론은 빠른 시일 내에 각자 회사를 사직하고 조그마한 건축회사를 공동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경제는 건축업 붐이 일어나는 80년대 말 이였고 젊은 세대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핵가족화 되는 시기라 주택수요가 많았다.

 

E씨 남편과 남편친구가 설립한 건축회사 CK 첫 사업은 연립 5동을 시공 분양했는데 대박이 났다. 기존 연립보다 시설과 조경을 고급스럽게 해 차별화 한 것이 대박의 주요인이었다. 첫 번째 연립에 대한 입소문이 좋게 나서 두 번째 연립 시공분양 역시 빨리 분양마감 되었다. 이러한 대박의 연속은 E씨 남편과 남편친구를 부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성공여세를 몰아 아파트를 시공분양하게 되었는데 1차 700여 세대 분양이 인기 절찬리에 마감되었다. 연속된 사업 성공결과로 E씨 부부는 그 당시 흔하지 않았던 외제차를 몰면서 부를 즐기었고 1년에 한두 번 가족동반 해외여행을 다녔다. 공·사석을 불문하고 기사 딸린 외제차를 타고 회장직함 명함을 건네며 속된 말로 잘 나갔다. 미국 유명대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대학교수인 그의 큰 처남에게도 으스대며 거드름을 피울 정도로 부를 즐겼다.

 

대우그룹마저 삼켜버린 IMF 사태로 건축회사 CK는 부도가 났고 부의 잔치는 서천의 구름처럼 사라졌다. 건축회사 CK의 망한 주원인은 E씨 남편과 그의 일가친지들의 부동산 담보로 과도한 은행 차입경영이 큰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E씨 가족은 몇 백억의 빚쟁이가 되어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되었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E씨 남편과 관련된 모든 동산·부동산은 압류가 되었고 담보 제공한 일가친지들도 거지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비화는 동업자인 E씨 남편 친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해가 없었던 이유 중 첫째는 남편친구는 살고 있는 아파트를 회사 은행대출 시 담보제공하지 않았다. 둘째는 아파트 시공분양 전에 E씨 남편의 요구도 있었지만 공동대표직이 과분한 것 같아 대표직을 E씨 남편에게 넘겼다. 셋째는 대표직을 넘긴 후 비등기이사로서 월급쟁이 상무이사로 재직했기 때문에 회사부도에 대한 무한책임이 없었다. 과욕 없이 평범하게 살려는 그의 인생철학이 이유들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E씨 남편은 부도난 후 경제사범으로 6개월 형을 살다 나와 둘째 처남의 도움으로 파산신청 후 법원의 파산선고를 받았다. 파산선고 후 지난 영욕의 세월을 모두 잊기 위해 그리고 일가친지들을 볼 면목이 없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일용직 일을 하다 14년 전에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파산선고가 남편의 사회 경제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면서 파산신청을 한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다. 사연 중 하나는 아내 E씨가 남은 여생동안 자식을 위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결단이었다. 부부는 일심동체인 동시에 경제공동체이므로 남편의 빚을 청산하지 않으면 아내의 경제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두 번째 사연은 자식들이 빚을 상속받지 않고 잘 살 수 있게 함이었다. 현행법상 아버지 사망 후 일정기간 내에 상속포기를 하지 않으면 부자지간에 빚도 상속되기 때문에 파산선고를 택했다.

 

회사부도로 E씨는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앞이 캄캄했다. 갑작스럽게 신용불량자가 되어 모든 은행거래가 중단되었고 경제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풍전등화 같은 위태로운 집안 사정도 모르고 칭얼대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극한 선택을 수백 번 생각했었다. 이런 분별없는 행동에 친정어머니의 서릿발 같은 호통과 막내 동생의 물심양면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친정식구들의 도움으로 때늦은 사십대 나이에 꿈같이 흘러간 호사스러웠던 시절을 다 잊고 미용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취득했다. 취득 후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미용실에서 1년 정도 수습 과정을 밟았다. 수습 후 애들을 친정에 맡기고 살던 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읍 소재지에서 미용실을 개업해 미용실에 딸린 쪽방에 기거하면서 오직 자식들 장래를 위해 친정어머니처럼 억척스럽게 일했다.

 

친정어머니는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허리가 휘어지고 손이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지도록 일하며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삶을 사시다가 6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자식들 위해 아침 일찍 정화수 떠놓고 비는 정성이 대단했다. 미국 유명대학 박사인 큰 아들은 대학 교수로, 공인회계사인 둘째 아들은 큰 회계법인 이사로, 의사인 막내아들은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첫째 딸인 E씨만이 대학을 안 나왔지 둘째 딸도 약대를 나와 약국을 개업하고 있다, 이런 억척스럽게 사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E씨 역시 악착스럽게 살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잘 해서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큰 아들은 검사 5년차에 사직하고 지금은 처의 도움으로 미국 유명 로스쿨에 재학 중이고 둘째 아들은 미국회사 한국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둘 다 출가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어머니라 하면 껌벅 죽을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다 한다. 모든 험난한 역경을 아름답게 승화한 이들 모녀는 현대판 신사임당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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