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좋다

박선예 | 기사입력 2007/02/08 [00:00]

우리 집이 좋다

박선예 | 입력 : 2007/02/08 [00:00]
▲ 박선예 수필가  
이웃들이 하나 둘 이사를 간다.

내리붓는 장마 비랑 때맞춘 듯 시작된 이사행렬은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되었는데도 여전하다.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즐거움 때문일까. 떠나는 사람들은 쏟아지는 비나 숨이 멎을 듯한 무더위도 아랑곳 않고 연신 웃음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파트로 이사 온지 어느새 십 오년이다. 내 나이 삼십대 후반에 이사 와서 오십을 넘긴지가 벌써 두 해 째이니, 한창 좋은 세월을 이 집과 함께 한 셈이다.

생전 늙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의 머리는 어느새 반백이 되었고, 건강이라면 자신만만하였던 나도, 요즈음엔 어깨가 아프고 시력도 시원치 않게 되었으니, 십 오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가보다. 

그사이 중학생이던 아들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였고 초등생이던 딸아이도 혼인날까지 잡았으니, 이집이야말로 우리가족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곳이다.

어디 우리 가족뿐이랴. 맨 날 징징거리며 엄마 치마꼬리만 붙잡고 있던 사층 꼬맹이가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 한의대생이 된 사연도 알고, 여자라기보다는 건강한 사내아기 같던 칠층 딸내미가 애교 철철 넘치는 예쁜 여학생으로 성장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갑자기 부인을 잃고도 두 아이를 꿋꿋하게 키우는 자랑스러운 이웃의 안타까움도 함께 나누었고. 새댁소리 듣던 내 또래들이 손자 손녀를 등에 업고 나타나도 결코 놀라지 않을 정도로 오래 함께 한 곳이다

그래서 일까. 단 한번도 이사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유행처럼 번지던 모델하우스 구경이나 넓은 아파트에 대한 선망은 나와는 먼 이야기이다. 오히려 남편과 둘이 살기에는 서른 두 평 아파트도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는 편이니,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인가보다.

이사 온 첫날, 고층에 익숙하지 않던 우리 가족은 베란다에 나가는 것조차 모험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야경을 본 딸아이가 탄성을 질렀다. 

“야,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정말 예쁘다! 크리스마스 날에 이사 왔다고 우리한테 준 선물인가 봐.”

짐 정리에 정신없었던 우리들은 너나없이 베란다에 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한참동안 야경에 취해있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고층에 대한 두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아마 그때부터 인가보다. 이 아파트에 대한 사랑이 움튼 것이......,

사실 이 아파트는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선물을 지니고 있었다.

앞 베란다에서는 금봉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변화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거실은 때때로 나와 딸아이가 교감을 나누는 장소로 애용하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면 유난히 별을 좋아하는 딸아이와 나는 거실에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읊조렸다. 그런 날이면 아이는 곧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 거실에서 잠을 청하다가 우연히 마주한 둥근 달의 신비로움은, 족히 불면증을 치료하고도 남았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는데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하였다. 봄바람이 불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내게로 왔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마음껏 봄바람의 감촉을 즐길 수 있어 행복하였다. 막 삶아 찬물에서 건진 국수 가락처럼, 손가락을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바람의 느낌은 부드러움의 극치였다. 간혹 해질녘, 작은 방 창가에서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감빛노을을 볼 수 있다. 황홀하다 못해 경이로운 자연현상에 숨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이 다가오지만, 두발은 못 박은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 작은 창을 통해 본 계명 산의 설경도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 중 하나였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집은 소탈하기 짝이 없다. 근 삼십년이 가까운 장롱과 화장대, 그리고 낡아버린 식탁과 침대, 거의 생명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가전제품들이 함께 한다.

그래도 난 우리 집이 좋다. 이야기와 추억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음력 칠월 보름달이 거실 깊숙이 들어와 둥실거린다. 어서 새벽이 오기 전에 잠자리에 들라고 재촉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밤은 둥근 보름달과 함께 새벽을 맞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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