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눈

김영희 | 기사입력 2019/04/17 [08:52]

봄 눈

김영희 | 입력 : 2019/04/17 [08:52]

▲ 김영희 시인     ©

올해는 눈(雪)이 늦잠을 자다 꿈결에 온 것일까.

 

꽃이 한창 피어나는데 눈이 겨울보다 자주 내린다. 지난 3월 15일에는 진눈깨비가 내려서 온몸으로 받으면서 걸었다.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아서이다. 하늘이 흘리는 눈물에 젖어보고 싶었다. 옷은 차차 젖어들었지만 마음까지 젖지는 않았다. 이미 내 마음은 진눈깨비보다 더 흥건히 젖어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비도 외로워 눈이 그리웠을까. 눈도 외로워 비가 그리웠을까. 그리하여 비와 눈이 둘이 만나 꽃길을 걷는 것일까. 진눈깨비는 마치 아리랑을 연주하듯 내렸다.

 

눈은 3월인데 3번이나 내렸다. 강원도는 4월 10일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은 추울수록 가볍다. 물기가 많은 봄눈은 겨울보다 무겁다. 봄을 시샘하는 발길이 미안해서일까.

 

지난 4월 4일 대형 산불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강원도 이재민들의 하얀 눈물일까. 강원도 이재민들의 큰 상처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

 

꽃은 예년보다 일찍 핀다고 한다. 그런데 눈은 어찌하여 봄을 자주 찾아오는가. 봄꽃 눈꽃이 만나 서로 부둥켜 앉는다. 서둘러 핀 벚꽃 가지마다 꽃송이로 뒤덮이더니, 꽃송이만큼 초록 잎사귀가 돋아나고 있다. 바람이 불때마다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며 가슴으로 날아든다. 지는 꽃은 눈이 시리도록 작은 나비처럼 날아간다. 봄이 빠르게 스쳐간다 해도 봄처럼 마음을 위로해주는 이가 또 있을까.

 

봄이 오면 사람들은 봄을 놓칠세라 꽃길을 찾는다. 모든 자연이 겨울을 벗고 새로 태어나듯이 나도 봄으로 들어가 겨울을 벗는다. 온갖 꽃들이 반겨주는 봄을 입는다. 봄을 입으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은 사람도 부럽지 않다. 봄의 옷은 상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한해의 옷이다. 그러한 봄은 누구에게도 그늘을 주지 않는다.

 

 

봄은 뿌리부터 오는 것일까. 우듬지부터 오는 것일까. 홀로 말없는 말을 건네며 걷는다. 꽃과 호수와 달빛이 어우러지는 봄밤이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석촌 호숫가에 낡은 피아노가 놓여 있다. 오래된 피아노를 닮은 여인이 피아노에 앉아 감성을 두드린다. 오래된 피아노지만 소리는 녹슬지 않았다. 그녀의 감성도 나이보다 맑은 소리를 내었다. 귀에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달빛을 만나 흔들린다. 호수는 피아노 소리를 타고 야경을 부채질 한다. 그녀를 아는 지인들이 인사를 건넨다. 심취한 그녀는 일어날 줄 모른다. 여러 곡을 연주한 그녀가 드디어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주변에는 박수 없는 관객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나도 낡은 피아노에 앉아본다.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나는 용기를 내어 건반을 두드려 본다. 나는 가장 쉬운 아리랑을 연주한다. 어설프지만 다시 한 번 연주해본다. 오래된 피아노는 어설픈 나에게 용기를 주는 소리를 낸다. 피아노에서 일어나 호수를 들여다본다.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봐야 끝이 보이는 123층 서울스카이 건물이 보인다. 서울 스카이 건물 그림자가 호수에서 일렁인다. 호숫가 야경이 다채롭다. 아직 서울스카이 전망대에 올라가 본 적은 없다. 딸집에 가려면 잠실을 거쳐서 간다. 그러나 석촌 호수의 여유로운 야경은 처음이다. 야경은 어두운 벽에 보석을 걸어놓은 것 같다. 한참을 머물던 호숫가에서 나오려 할 때, 나이 비슷한 여성이 홀로 다가와 묻는다. 나이가 몇이에요. 생일은 언제에요. 아이는 몇 명인가요. 집은 여기인가요. 그건 왜 묻느냐고 물어본다. 나이가 비슷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또 묻는다. 바람에 벚꽃이 스산하게 흩날린다. 낯선 여인의 질문이 유쾌하지가 않아진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런 거는 왜 묻나요. 그러자 눈을 마주친 그녀는 생일이 봄인가요. 또 묻는다. 그런 거 묻지 말아요. 하고는 다시 돌아보니 그녀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 그녀는 봄 도깨비였을까. 꽃보라가 눈처럼 내려앉은 호숫가에 오래 된 피아노 건반이 다시 울린다. 소년의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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