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침묵

김영희 | 기사입력 2018/10/10 [08:01]

밤의 침묵

김영희 | 입력 : 2018/10/10 [08:01]

▲ 김영희 시인     ©

나는 가끔 새벽에 나와 집 주변을 걷는다. 집집마다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이 침묵처럼 닫혀있다. 삽상한 가을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귀뚜리 소리도 제법 여물어가고, 옹골차게 달려있던 감이 보란 듯이 붉어간다. 감나무를 타고 올라간 가느다란 줄기에 커다란 박이 서너 개 달려있다.

 

고요한 가을 냄새가 난다. 집 뒤로 나 있는 길가에는 족두리꽃(풍접화)이 연실 피어나고 노란 소국도 가을의 향기를 더한다. 가을비 내린 도랑이 초승달아래 또랑또랑하게 흐른다. 주인 없는 집터는 오이처럼 생긴 가시박이 무성하게 덮어가고 있다. 가시박의 기세는 주인 있는 다른 집 담도 넘보는 것 같다. 도랑을 따라 걷다보니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바라보니 소년과 소녀가 있다. 가로등아래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인다. 나는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본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듯 한 둘의 모습에서 술기운이 느껴진다. 소주병이 그들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밤을 같이 지새운 모양이다. 소년이 소녀의 무릎을 베고 날바닥에 누워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들의 등 뒤 쪽으로 발소리를 누르며 돌아간다. 건물 하나를 빙 돌면서 살펴보니 앉아 있던 소녀가 일어나 걷고 있다. 손에는 빈 소주병이 들려있다. 소주병을 버리려는 걸까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흐느적이던 소녀는 소주병 무게도 버거웠는지 병을 놓치고 만다. 소주병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난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소녀는 주저 물러앉는다. 소녀는 깨진 소주병의 조각을 하나 줍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소년이 급히 달려와 소녀에게서 유리조각을 뺏는다. 소녀는 처량한 표정이다. 소년은 소녀를 살살 달래고 달래어 앉았던 곳으로 다시 데리고 간다. 깨진 유리는 이슬 맞은 소녀의 마음처럼 새벽을 베고 있다. 이슬 맞은 소녀의 단발머리가 그의 젖은 마음을 가린다.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아진다. 나는 그들의 마음도 아침처럼 밝아지길 바래본다. 날이 밝아지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비틀비틀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 달 전에도 새벽에 나와 걷다보니 도랑 건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 셋과 한 소녀가 앉아 이야기 나누는 소리였다. 그들도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소녀가 잠시 도랑가로 내려가자, 소년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주며 정문 쪽으로 오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읽던 책을 들고 일어나 소녀가 있는 옆으로 걷는다. 예쁜 소녀는 혼자 소주를 병째로 마시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푹푹 쉬는 모습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무엇이 그대들을 그리 힘들게 하는가’ 나는 마음으로 간절히 물었지만 하마터면 목소리가 터져 나올 뻔했다. 소리 내어 묻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소년이 소녀를 부르자 소주병을 비운 소녀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한 소년이 소녀에게, 왜 이러냐고 묻자, 갈 데가 없다고 소녀는 말한다. 한참 후 소녀의 부모인지, 차를 몰고 소녀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소녀를 데리고 가려 애쓴다. 그러나 소녀는 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소녀를 억지로 차에 태워 데리고 간다. 그러자 소년들도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들이 가고 난 후, 갈 데가 없다던 소녀의 말이 맴돈다. 데려간 사람이 부모라면, 그렇게 애타는 부모들인데 소녀는 어이하여 집으로 갈 생각을 아니할까.

 

예쁜 나이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보니 걱정이 된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소녀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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