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천의 꿈과 도시의 역사를 알았다면···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기사입력 2016/08/30 [13:58]

충주천의 꿈과 도시의 역사를 알았다면···

전홍식 교통대학교 한국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 입력 : 2016/08/30 [13:58]
충주천은 직동의 발티에서 발원하여 호암동, 용산동, 지현동, 성서동을 경유하여 대가미 합수머리에서 계명산에서 발원한 교현천을 받아들여 봉방동을 거쳐 달천에 합류하는 도심하천으로 사천이라고도 불렀다.
충주천의 상류 발원지인 직동에는 신라 문무왕대에 원효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 창룡사와 자라바위가 있다. 보다 아래 구역인 호암동은 마을 뒷산인 남산에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범바위라고 하였고 그것이 고유지명이 된 경우이다. 호암동에는 신라와 관련된 전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남아있는데 송쟁이뜰과 사천개가 대표적이다.
충주중학교 부근의 송정이뜰(松亭坪)은 신라 진흥왕 때에 귀척자제와 6부호민이 경주로 부터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해지며, 충주 남산초등학교의 서편 부근의 사천개는 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아 사천개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하며 물길이 네 갈래로 갈라져 흘렀기 때문에 사천개라는 전설이 있다. 창룡사, 송정이뜰, 사천개에 얽힌 이야기들은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사천개에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충주평야의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원 저수지인 소제(小堤)를 확장하여 호암지를 축조하면서 그 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수구문과 수로가 있으며 호암지라는 지명도 범바위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지현동 지역으로 내려오면 1980년대 초반 충주댐의 완공으로 살미, 한수, 청풍, 수산, 한수, 단양 등의 지역의 일부분이 수몰되고 도시화, 산업화로 이촌향도현상이 본격화되기 까지 번성했던 남부시장을 만날 수 있다. 남부시장 아래의 지곡은 천변을 따라 일제시기에는 한옥마을이 형성되어 부촌으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대림산의 산줄기인 사직산에는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사직단이 있었으나 일제시대인 1912년에 일본인들이 사직단 자리에 신사를 건립되면서 자취를 감추는 비운을 겪었다. 사직산의 또 다른 명소인 대원사는 1929년에 도심포교를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보물 98호인 철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갑교 건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충주읍장이 있다. 충주천과 교현이 합류하는 대가미 벌판은 1930년대 전시체제 이전까지의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혹한 일제시기 충주 조선인들이 모여 줄다리기, 씨름, 각종 오락 등의 축제를 통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아픔을 달랜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충주천이 역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보다 부각된 것은 읍치가 현 성내동지역으로 이전하여 오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도시가 언제 이전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읍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읍성이 이전하였고 거주와 교통이 편리하고 경제활동이 보다 유리한 평지성인 현재의 성내동으로 고려 말경에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물길은 일상생활과 재해에 대한 대비 관점에서 중요시되었고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도시의 공간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시대 충주 도시공간은 교현천과 충주천의 내부에 위치하였다. 도시공간의 영역은 제1영역은 충주읍성 내이고, 제2영역은 충주천과 교현천의 내부이며, 제3영역은 진산인 대림산을 중심으로 남산과 계명산 그리고 달천강과 한강이었다. 실질적인 도시영역은 충주천과 교현천의 내부이었기에 보호와 관리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 들어 일본인들에 의해 읍성철거와 함께 조선시대 역사도시 공간이 파괴되고 식민지도시로 변형되면서 충주천은 역사성을 상실하고 잊혀져 갔다. 해방이후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근대화의 이름으로 직강하천으로 변화하였고 1990년대 들어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하천의 일부구간이 복개되는 굴절을 겪었다. 충주천을 따라 흘렀던 역사, 전설, 민담 등 소중한 삶의 이야기는 잊혀지거나 방치되었고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다.
2013년 3월부터 시작된 충주천 복원사업은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도시를 알지 못하고 충주천과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충주천 복원의 결과는 처음부터 예상되는 바였다. 그러나 복원이 끝나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충주천의 현재의 모습은 예상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여서 왜 복원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지경이다. 충주의 문화와 전통이 어우러지고 역사도시의 정취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충주천의 모습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지 안타깝고 착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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